외국인 관광객 유치 육해공 교통망 대폭 확충 절실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완도의 인.물적 자원 활용, 글로벌 도시 만들자 해양 진출 꿈꾼 장보고의 땅 청정해역서 나오는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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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년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는 그의 고향 청해진을 수군(水軍)기지로 설진(設陣)하는 한편, 신라와 중국, 일본을 잇는 최초의 민간무역전진기지로 만들었다. 그는 견당매물사와 대일회역사를 당과 일본에 각각 파견, 국제민간무역을 벌였다. 이들 상단은 중동 및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된 진귀한 물화(남해박래품)를 사서 주변국은 물론, 페르시아 상인들에게도 팔았다. 이 때문에 당시 청해진에는 온갖 물품을 실은 교관선(무역선)의 입출항이 빈번했으며 아랍 및 페르시아 상인들로 넘쳐났다. 이처럼 9세기의 청해진은 오늘날의 ‘글로벌(Global) 도시’였다. 하지만 교통 및 통신기술이 거의 발달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청해진이 국제도시로 발돋움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에서 가장 오지(奧地)였던 청해진이 글로벌 도시로 발전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글로벌 마인드와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장보고 대사의 지역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왜냐하면 섬 출신이었던 장보고는 철저한 신분제사회였던 통일신라시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안사의 난(755~763)으로 혼란한 당(唐)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군중소장직에 올랐다. 그는 산동성 석도진에 항해사찰인 적산법화원을 창건했으며 재당.재일신라인을 규합,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는 신라인이 노예로 팔리는 것에 분개하여 당나라에 쌓았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흥덕왕을 설득시켜 청해진을 설진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의 고향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으며 개척 및 도전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장보고는 청해진이 신라와 일본의 큐슈지역은 물론, 중국의 동남부 및 동남아, 아랍세계로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게다가 신라의 첨단산업인 조선술과 항해술을 이용하여 무동력 선박으로 원거리 항해하는 비법을 터득하는 한편, 오늘날 중국의 닝보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잇는 동중국사단항로를 개발했다. 그는 수백 개의 섬으로 구성된 청해진이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중간 기착지로 적합하다고 판단, 민간자유무역의 기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당나라 월주요에서 생산된 해무리굽 청자를 육로 대신 바닷길을 안전하게 수송해 통일신라와 일본 등지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처럼 청해진은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안식처였으며 항해에 필요한 물과 식량 등을 제공했다. 셋째, 청해진이 글로벌 도시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휘하에 글로벌 인재들이 많았다. 그는 서남해안에 암약하던 해적을 소탕할 때 항복할 경우 자신의 부하로 받아들었다. 이들 해적들의 대부분은 조류 및 해류, 해풍은 물론, 암초 등에 대한 바다 정보를 꿰뚫고 있는 등 항해 경험이 풍부한데다 주변 나라의 사람들과도 교류한 경험이 많았다. 장보고가 짧은 기간에 한중일 해상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도움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청해진의 글로벌 도시 재현할 절호의 기회 맞아

그렇다면 851년 청해진이 혁파된 지 1167년이 지난 오늘의 완도는 어떤 모습일까? 완도는 장보고 대사가 이룩했던 청해진의 글로벌 도시를 재현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첫째, 그동안 완도 발전을 견인하는데 앞장을 섰던 지도자들이 많았다. 이들 지도자들의 지역사랑 덕분에 완도는 전남에서 대표적으로 잘 사는 지역으로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BS2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해신(海神)’의 촬영세트장 유치와 더불어 청산도 슬로우시티 지정, ‘청청바다 수도 완도’ 선포와 더불어 ‘자연그대로의 농법’ 등이 정책에 반영되면서 완도에서 생산된 특산품들이 해외에 수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둘째, 완도군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물적 자산들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부상되고 있다. 우선 완도에서 생산되는 김과 미역, 다시마, 톳 등 해조류는 물론, 전복 및 광어 등이 미국 및 일본, 홍콩, 중국, 베트남 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또한 완도 전복은 2010년에 만들어진 지속가능한 양식관리위원회(ASC) 인증을 아시아 최초로 취득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ASC인증을 지금까지 취득한 어가(漁家)는 세계에서 총 17개 어가이며 이 중 14개 어가들이 모두 완도 청산도의 전복양식장들이다. 반면 세계 80%의 전복을 생산하는 중국은 물론, 일본 어가에서도 ASC 인증을 따지 못했다.

이밖에 완도군은 2030년까지 1조원을 투입해 해양기후 및 해양환경 관련 자원을 활용해 세계적인 해상헬스케어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전략을 마련,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완도의 바닷바람과 갯벌, 해수, 해사(海沙) 등이 치매 및 아토피 예방은 물론, 관절염 치유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와 더불어 세계 최초 완도해조류국제박람회를 개최, 완도의 브랜드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있다.

셋째, 완도가 전남을 대표하는 지자체를 넘어서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려면 무엇보다도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인적 자원을 확보해야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완도군은 기존의 장보고 선양사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장보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은 장보고의 후예인 재외동포경제인 가운데 대한민국의 경제 및 문화영토를 해외에 확장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남긴 한상(韓商)을 대상으로 ‘장보고한상 어워드’를 제정, 시상하고 있다. 사단법인 장보고글로벌재단과 함께 시행하고 있는 장보고한상 어워드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13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특히 이들 수상자의 출신국가도 미국을 비롯,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7개국에 이르고 있다. 이들 수상자의 상당수는 태어나서 ‘장보고’와 ‘완도’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으나, 이들 수상자들의 덕분에 세계 180개국 750만 명의 재외 동포들 가운데 ‘장보고’와 ‘완도’를 기억하는 한상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완도군은 수상자의 성공스토리를 기획전시하는 ‘장보고한상 명예의 전당’을 개관, 운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국을 찾는 재외동포 2세, 3세 등 후손들이 장보고한상 명예의 전당을 방문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제 완도는 장보고의 고향만이 아니라 재외동포의 안식처로 인식되고 있다.

완도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교통망 확충 개선해야

완도가 글로벌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비행기와 자동차, 선박 등을 통해 완도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각종 교통망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현재 광주~완도간 고속도로 및 목포-보성을 잇는 철로 공사가 건설하고 있다. 완공되면 완도의 접근성은 대폭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SOC시설이 태부족하다. 우선 고흥에서 금당~금일~약산을 잇는 해양관광도로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충북 및 대구, 영남권, 전남 동부권에서 완도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목포에서 해남 화원을 거쳐 완도까지 철도를 건설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하드웨어 외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쉽게 완도를 방문할 수 있도록‘제주.완도’라는 새로운 브랜딩의 홍보 전략을 마련,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외국인들에게 완도가 제주와 지리적으로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줄 수 있다. 예전에 홍콩에 가면 자연스럽게 마카오를 들렸던 것처럼 제주를 가면 완도를 쉽게 갈 수 있도록 글로벌 브랜드 전략을 만들자는 것이다.

황상석 조선대학교 초빙교수

고금도.소안도 등 구국.항일 유적 청소년 교육 메카로

완도는 장보고 청해진 대사만 있는 게 아니라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 제독과도 인연이 깊다. 이순신 제독은 진도 울둘목에서 일본 전함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 후 삼도수군통제영의 근거지를 1598년 2월 16일에 목포 고하도에서 완도 고금도로 옮겼다. 이순신 제독은 고금도에서 조선수군병력을 2천명에서 7천3백 명으로 대폭 늘렸다. 이처럼 이순신의 조선순군과 진린(陳璘) 제독의 명나라 수군은 이곳을 근거지로 일본 수군과 싸울 전력을 보강했다. 특히 이곳에서 출발한 조명연합군이 노량해전의 압승으로 정유재란을 종식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고금도는 호국의 메카이다.

또한 완도는 항일운동의 발원지이며 항일교육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완도 소안도는 1919년 3월 15일에 주민 6천 명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중 8백 명이 옥살이를 했다. 이들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원인은 “배워야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립 소안학교’ 설립에 동참했지만, 일제가 ‘항일운동의 배후자’라며 강제로 학교를 폐쇄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완도에 많은 항일운동인사를 양성한 교육사상가이며 항일애국지사인 고 소남(小男) 김영현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항일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김 선생은 유배 온 이도재 선생(해배 후 전라관찰사 부임)에게 글을 배웠고 1905년 한양에 올라가 융희학교 1기로 입학해 1909년에 졸업했다. 그는 1912년 고금면 회룡리에 사립학교를 세워, 8년간 운영했다. 또한 1925년 사립교인학교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을 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4년에 강제 폐쇄됐다.

이처럼 교육자로써 수많은 제자를 항일운동투사로 양성했던 그는 허례허식 및 미신타파, 해태(김)양식 개발, 농어촌 기계화, 산림녹화 등 농어촌 계몽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소남 선생은 76세에 원불교에 귀의하여 군외면 불목리 대지 및 임야 1만5000 평을 교당에 기증했다. 이곳에는 완도 청소년수련원이 설립됐다.

이처럼 완도에 산재해 있는 구국 및 항일운동을 벌었던 이순신 제독과 소안주민, 김영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인성교육과 청소년들에게 힐링 및 체험 교육프로그램을 발굴, 운영하자는 것이다. 완도가 국제청소년교육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다.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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