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의 독자 정치체… 150년 이상 백제와 공존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내가 아는 마한 잃어버린 마한 700년 역사 일본.중국 학자들과 교류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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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의 독자적인 정치체를 구축한 마한 남부 연맹은 150년 이상 백제와 공존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걸쳐 있었지만 4세기까지 대부분 백제로 편입됐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은 마지막까지 저향했다.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은 고대 마한의 마지막 중심지였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농토와 당시 바다와 같은 영산강을 이용함으로써 내륙과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가 활발히 이뤄졌기에 마한의 최대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마한, 진한, 변한, 삼한의 부족연맹 국가가 있었다.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발전하여 한강, 아산만, 금강, 영산강,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마한의 중심인 목지국의 진왕은 진한, 변한 까지를 다스렸다. 3세기 후반 백제에 밀리면서 금강 이남 익산을 거쳐 중심권을 남쪽으로 이동했던 마지막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6세기 중엽까지 백제와 겨루면서 독자적 문화와 강력한 권력의 지배 세력으로 존재해 왔다.

최소한 150년 이상을 마한세력으로 존재했던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지역은 마지막 마한의 중심지였다. 마한은 삼한의 맹주로 백제, 신라, 금관가야 이전의 한국 초기역사 국가이면서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다. 한국 국호 유래의 근원이 되었다. 삼한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각각 신라와 가야로 발전한 것으로 보지만, 마한은 백제가 성장해 나감에 따라 점차 그 범위가 축소되는 과정과 백제의 간접 지배를 거치면서 마지막 흡수 되었던 지역적 특징이 있다.

영암과 나주에서는 ‘마한문화축제’를 2015년부터 시작했다. 2000년전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마한의 숨결을 느끼면서 긍지를 갖고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마한의 찬란한 역사를 발굴, 재조명해서 이를 고대문화 역사 체험 관광자원으로 활용키 위한 축제이다. 영산강 유역의 서남부 지역은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에도 그냥 변두리 였기에 정부의 국토개발 정책이 신라 문화권, 백제 문화권, 가야 문화권 등으로 이뤄져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지역은 마한시대 왕성했던 고대역사 문화를 내세워 체계화 하고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과 위상을 일깨워서 잃어버린 마한 700년의 역사를 더욱 연구하면서 앞으로 고대역사 문화연구 및 체험관광 중심지로 육성해 가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공약 사업으로 가야사 연구와 복원 사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반면 우리지역에서는 전남도 차원에서 ‘영산강 유역 고대 문화권’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명칭을 ‘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권’ 으로 했으면 한다. 영암 시종면에는 지난 2006년 마한문화공원이 준공됐다. 3만3058㎡ 면적에 잔디와 6000여주의 수목, 비지터센터, 고분탐사관, 전망대, 휴게소, 남해신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움집, 제단, 족장집, 금속공방등 ‘마한촌’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오는 10월19 ~ 21일(토,일) 네 번째 마한축제가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에서 각각 열린다. 영암은 ‘마한축제추진위원회’ 주관으로 ‘마한의 숨결! 문화를 깨우다’를 주제로 5개부문 44종의 프로그램을 남해신당 해신제를 시작으로 퍼레이드 행사에 이어 준비하고 있다. 시종면민의 날 기념식, 외국전통민속공연, 국악, 무예공연과 마한축제 발전 방향 세미나, 마한 청소년 페스티벌, 마한역사 체험 및 토크 콘서트, 마한 읍.면 어울마당 등이 진행된다. 영암과 나주에서 별도 운영되는 마한축제가 전라남도 축제로 함께 추진되기를 숙원하고 있다.

김한남 영암문화원장

문산재 담 밖으로 들리는 강의 듣고 글 깨친 천재

영암 출신 왕인 박사는

왕인은 백제 14대 근구수왕 380년 3월 3일 월나군(月奈郡) 이림(爾林)의 성기동(聖基洞)에서 왕 순(王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의 성기동이다. 성기동은 ‘신령스런 바위(靈巖)’인 명월(明月)의 기운(氣運)이 가득한 월출산(月出山)의 주지봉(朱芝峰) 밑에 자리한 아늑한 터(址) 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박사 왕인이 탄생한 고택지(古宅地)가 자리잡고 있다. 고택지 앞으로 차고 맑은 냇물이 흐른다. 성천(聖川)이며, 성천 건너편으로 월출산의 아름다운 지맥(支脈)이 느슨하게 굽이쳐 흐르고 있다.성천 바로 위쪽에 ‘구유바위(槽岩)’라 불리우는 기암이 육중하게 자리잡고 고택지를 바라보고 있다.

월출산 주지봉(朱芝峰)의 맑은 정기를 받고 태어난 왕인은 어려서부터 영특해 문산재(文山齋) 담 밖으로 나오는 강(講)을 듣고 홀로 글을 깨우칠 만큼 총명했다고 전한다. 왕 순은 마흔이 넘어 인(仁)을 얻었다. 그는 인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인을 문산재(文山齋)에 입문시켜 대학자로 길러 내겠다고 다짐했다. 문산재는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와 명유(名儒)를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었다. 각처에서 학덕이 높은 석학들이 모이는 곳이어 수재만이 입문할 자격이 주어졌다. 내부 운영 규율도 엄격했다. 문산재에서 문.무과에 급제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한다.

문인재사는 학문의 전당

문산재 교수들은 왕 순의 간청을 받아들여 인(仁)을 입문시켰다. 왕 인의 영특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와 조교, 서생들은 어린 소년 인(仁)의 총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의연한 몸가짐에 감탄 했다 한다. 그러나 인(仁)의 나이 아홉살 되던 해에 아버지인 왕 순은 괴질로 세상을 떠났다.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가세는 기울어져 갔다.이런 처지에서도 인(仁)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쉬는 동안이면 조용히 문산재 부근의 숲속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자 인(仁)은 오히려 더욱 어른스러워지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었다.

왕인의 학문은 거듭 발전을 하였다. 그는 15세에 이미 논어(論語) 효경(孝經),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에 능통하였다. 스승의 가르침보다 깊이 사색하고 추구(追究)하는 시간을 더 중히 여겼다.

왕인은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속에서 조그마한 석굴(石窟)을 발견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바위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굴 안에 들어가 보면 육중한 바위덩이가 지붕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자연석이 사면의 벽을 이루어 마치 아늑한 방안과 같았다. 왕인은 이 신비스런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왕인은 아침 일찍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어느 틈엔가 자리를 떠나 석굴로 들어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밤이 으슥해지면 다시 석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왕인은 이 석굴을 소중하게 여겼고, 책굴(冊窟)이라 했다.

왕인은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선학들의 권고에 못이겨 과시(科試)에 응하기로 했다. 한 차례의 과시를 통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왕이 수여하는 박사제도가 있었다. 그 가운데 오경박사는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 경학(經學)에 통달한 전문적인 석학에 부여하는 칭호이다.8세에 문산재에 입문한 왕인은 0년만에 오경박사에 등용된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선비가 됐다. 백제에서도 손꼽히는 학자가 되어 왕으로부터 박사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문산재는 더욱 수학자들이 모여들어 많은 석학들을 배출함으로써 그 명성이 사해에 떨치게 되었다.

왕인박사의 도일

박사 왕인은 그로부터 2년후 20세의 나이로 문산재 조교의 직위에 올랐다. 그의 학덕은 왕실과 도성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신왕(阿辛王)은 박사 왕인을 여러 차례 불러 태학(太學)에서 일하여 줄 것을 종용했다. 박사 왕인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 했던 것이다.그때마다 박사 왕인은 거절했다. 그는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은고(恩顧)를 입어온 문산재에서 후학을 양성할 뜻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 결국은 박사 왕인의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신왕은 틈틈이 박사 왕인을 도성으로 초빙하여 태자 전지( 支)와 서로 벗하며 경륜을 논하도록 했다. 전지도 경전을 능히 해독할 수 있는 학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태자 전지는 박사 왕인의 높은 학덕과 깊은 경륜에 감탄했다. 오경에 통달한 박사 왕인은 사람의 관상을 마음속으로 꿰뚫어 보았다 한다. 어느날 박사 왕인은 태자에게 부왕과 잠시 이별하여 물을 건너 멀리 떠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고 전해진다.이 무렵 아신왕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함은 물론, 제16대의 진사왕(辰斯王)때 고구려에 빼앗겼던 10여개의 성을 다시 탈환코자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하여 아신왕 6년(397년)에 이미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와 선린관계를 유지해왔던 일본과 더욱 깊은 수호관계를 맺고 원호를 청했다.이때 태자 전지를 볼모로 결정했다(三國史記 百濟 阿莘王條 : 六年夏 五月 王與 倭國結好 以太子 支爲質). 그가 바로 일본에서 말하는 아직기 즉 아지길사(阿知吉師)이다.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는 볼모의 몸으로 일본 응신(應神)천황의 태자 토도치랑자( 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그 당시 일본은 문자가 없어 구구상전(口口相傳)으로 원시상태(수렵생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화(大和)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륜.도덕도 그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비해 백제는 북방으로 중국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낙랑.대방과는 지리적으로 밀접하여 통행이 잦아 국가질서의 수립이나 문화적 기반에 있어서는 고구려보다 앞서 있었다. 백제 중흥을 이룬 제13대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되는 무렵 백제의 문화는 전성기를 맞았다. 학술과 문예가 발달한 백제는 경사(經史).문학으로부터 음양오행.역본.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오경박사만이 아니라, 의학.역상(曆象).복서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 칭호를 부여했다. 의박사.역박사(曆博士=卜筮).노반박사( 盤博士).와박사(瓦博士)등의 박사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전갑홍 영암문화관광진흥협 이사장.관광학 박사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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