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재판’이 사법부 신뢰 회복의 열쇠다

박성원 사회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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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광주지방법원 출입기자 때의 일이다. 당시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들이 지역 유력인사들과 어울리며 향응을 제공받고 접대골프를 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범죄의 유.무를 가리는 사법적 판단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하는 판사들이 지역 유지들을 사사롭게 만나고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국민은 분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법원의 판사 비리 재발 방지책이 전국 법원에 일제히 시달됐다. 중요사건 재판 결과가 나오면 판사실을 찾아가 판결의 의미를 확인했던 출입 기자들의 취재 활동에도 제약이 생겼다. 강화된 법관 면담 절차가 문제였다. 변호사와 사건 당사자들의 무분별한 만남을 막기 위해 마련된 규정은 판사실을 방문하려면 24시간 전까지 서면이나 전화로 방문신청을 하고 판사에게 허가를 받도록 했다. 취재 목적의 기자 방문까지 제한하진 않았지만, ‘괜히 사람들을 만나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판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광주지법의 한 고위 법관이 출입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일선 판사들과 전화 통화도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온 만남 제의가 무척 반가웠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조촐한 식사자리를 예상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우리를 초대한 법관은 반주용 술까지 직접 준비해 우리를 맞았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요즘 판사들이 외부인과 만남을 기피하는데 기자들을 이렇게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법관은 “요즘 판사들의 비리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부끄러운 일”이라면서도 “특정인과의 결탁이나 비리를 막기 위해 판사실 방문을 제한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판사와 시민을 격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판사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요즘 사회의 이슈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해야 보다 설득력 있고 다툼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형사재판의 유.무죄, 형량 결정으로 고민할 때 일부러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나누며 ‘힌트’를 얻은 자신의 경험도 얘기했다. 법에도 눈물이 있듯이 천편일률적인 법 적용이 아니라 세상 사정을 살펴 서민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생계형 범죄자를 선처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판사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지키는 공평무사한 판결이 내려지는 ‘좋은 재판’에 대한 고민도 깊이 해야 한다고 했다.

법정에서 목격한 검은색 법복의 위세 때문인지 몰라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엄정함과 냉정함을 갖춘 존재로 여겨졌던 판사들이 따스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공정하게 재판에 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미 있는 만남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 농단 의혹 등이 드러나면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다. 모든 게 우리 사회 법치주의와 정의 구현의 수호자라는 사법부가 벌인 짓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사법 개혁은 이제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과거 여론이 악화하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지엽적인 자체 개혁안을 들고나와 적당히 위기상황을 넘겨왔던 관행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이젠 본질적인 문제부터 바로잡는 사법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땅에 떨어진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판사들부터 변해야 한다.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판사들이 임용식에서 제창하는 선서문 중 일부다. 판사들이 판결 기준으로 삼는 ‘양심’은 개인의 독단이 아닌,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인식이어야 한다. 정치인.재벌 등 소위 권력층에게만 적용되는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어긋난 구속영장 기각, ‘고무줄 형량’ 등 솜방망이 처벌은 사라져야 한다. 10여 년 전 광주지법 법관이 고민했던 ‘좋은 재판’의 정의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빈부나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정의로운 판단이 내려지는 ‘좋은 재판’이 일상이 될 때 국민들도 다시 마음을 열 것이다.

박성원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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