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와 고락 함께 한 양팽손, 호남 문풍에 큰 역할

김덕진의 종가이야기 화순의 제주양씨 학포공파 종가 급제 후 관직 진출… 사간원 정언.홍문관 수찬 역임 10대 양산보 조광조에 추천하여 중앙 정계 입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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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팽손, 소쇄원 양산보를 중앙 정계에 추천하다.

화순의 제주양씨 학포공파의 시조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다.

그는 조카뻘되는 10대 양산보를 최고 실력자 정암 조광조에게 추천하여 중앙정계에 입문하게 했다. 또한 조광조와 함께 수학하고서 사림세력을 키우고 왕도정치를 주창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묘사화 때 능성현(1632년에 능주목으로 승격)으로 유배 와서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양팽손은 사림정치와 전개와 호남지역의 문풍 진작에 중요한 역할을 한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나주에서 능성으로 이주했다.

양팽손은 쌍봉리(현재 화순군 이양면)에서 태어나서 인근 쌍봉사 절에서 독서했다. 월곡리(현재 화순군 도곡면)로 이사하고서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선생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담양의 송순, 나주의 나세찬 등이 모두 동문수학자이다.

1510년에 조광조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와 도의로 사귀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진출했다. 청요직으로 불리는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발하자 사림의 대표가 되어서 사화의 부당함을 상소했다. 이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했다.

●정암 조광조와 함께 사림정치를 이끌어 새로운 사회를 열다.

양팽손은 우리 민족에게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안견의 화풍을 이은 ‘산수도’는 사림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몇 안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또 그의 문집.학포집 부록에 실려 있는 기묘당금록은 기묘사림의 구성원을 파악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이다. 또 그리고 자신의 고향 화순에 소중한 향토문화유산을 남겼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학포당(學圃堂)이다. 학포당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길 74-3(쌍봉리)에 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92호로 1986년 2월 7일에 지정되었다.

양팽손의 서재였으나 현 건물은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192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양팽손은 1521년 학포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그림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가 그린 묵죽도와 후손이 제작한 학포 영정 등은 임진왜란 때 약탈되어 일본 야마구치현 대원사(大原寺)에 소장되어 있어 후손들이 1957년 가서 직접 사진 촬영을 한 바 있다.

후손과 지자체는 1994년 학포당을 보수, 1995년에 외삼문을 원래대로 지었고, 1996년에 담장을 설치했으며, 1997년에 담장 보수를 했다.

●능성으로 유배 와서 사사당한 조광조의 시신을 거두다.

또 하나는 죽수서원(竹樹書院)이다. 죽수서원은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에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로 1986년 9월 29일에 지정되었다. 죽수서원은 조광조와 양팽손을 모신 서원으로 전남에서는 두 번째인 1570년에 사액을 받은 곳이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성에 유배되자 양산보 등 그의 많은 제자들이 남행에 동행했다. 양산보는 이 길로 10대 정계 은퇴자가 되어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배소는 능성 읍내 문씨 집에 정해졌다.

갑자기 사약이 내려와 조광조가 사사되자, 양팽손이 그대로 두라는 임금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하여 능성현 쌍봉 중조산 아래(현재 이양면 증리 서원동 일명 조대 감골)에 가매장하였다.

이듬해 그의 가족과 함께 선영으로 운송하고 그 자리에 모옥(茅屋)으로 사당을 짓고 문인.제자들과 함께 향사(享祀)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 후 조광조의 신원이 단행되고, 관작이 회복되고, 문묘에 봉안되니 1570년 조정의 명에 의하여 능성현(현재 한천면 모산리)에 서원을 세워 ‘죽수(竹樹)’의 사액을 받았고, 1630년(인조 8)에 양팽손을 함께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이 내려지자 1869년(고종 6) 위패를 매안(埋安)한 후 철폐되었다. 그 후 1971년 4월 23일 능주 유림과 학포의 후손들이 재건했다.

조광조는 사후 사림의 표상으로 추앙받았다. 그래서 그의 얼이 깃들어 있는 능주의 죽수서원과 적려유허비는 조선 선비들의 참배 코스였다. 오는 선비마다 조광조의 높은 절개와 넒은 철학을 동경하면서, 그와 고락을 함께 했던 양팽손도 떠올리곤 했다.

●많은 아들들, 전라도 각지에서 큰일을 하다.

양팽손은 다복한 사람이다. 많은 아들을 두었고, 그 아들들이 지역사회에서 명망가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큰 아들 양응기(梁應箕)와 그의 직계 후손들은 아버지가 살았던 월곡리에 세거했다.

그래서 월곡리에 1631년(인조 9)에 건립된 양팽손 부조묘가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4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부조묘에서는 매년 음력 8월 18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양응기의 손자 양인용(梁仁容, 1555~1615)은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이양면 강성리 양자강 변의 경치 좋은 곳에 송석정(松石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들렀고, 후손들의 중수에 의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양인용의 아들 양위남(梁渭南, 1574~1635)과 손자 양우전(梁禹甸, 1595~1672)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

양팽손의 셋째 아들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은 나주 박산(현재 광주시)으로 이거했다.

그는 중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 생활 중 척신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사림파의 일원으로써 도내 사림세력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아들 양산룡.산숙 형제와 사위 김광운 등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가훈,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절의를 지키고 살아라”

넷째 아들 양응필(梁應畢)은 능주 양씨들의 원 터였던 쌍봉리에서 살았던 것 같다. 중간에 후손들이 이양면 품평리로 이거하여 현재 그곳에서 종손이 살고 있다.

양응필의 아들 양산욱(梁山旭, 1551~1604)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 군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했다.

혈족인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은 을사조약 체결 후 의병을 일으켜 쌍산의소(雙山義所)를 세운 분이다. 화순 동복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에 패하여 체포되어 장흥 감옥에 복역 중 숨을 거두었다.

종손 양회준(梁會駿) 옹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곡식으로 곤란한 사람들을 구휼했으며,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밥을 차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손은 집안의 가통을 계승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중과 지역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종부 정윤남 님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갖은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스럽게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특히 음식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

학포공 종가의 가훈이 충효절의(忠孝節義)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절의를 지키고 살아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인물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다.

앞에서 말한 분 외에도 매우 많다. 몇 분만 말하자면, 대한자강회.호남학회 등에서 활약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서명하고서 태화관 독립 선언식에도 참석한 양한묵 선생이 있다.

고창고보(현재 고창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한 양태승도 있다. 16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호남 역사를 거론할 때 학포와 그 후손들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끝>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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