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백련사 ‘사색의 길’… 일대는 거대한 지혜정원

송태갑의 정원이야기 사색과 지혜의 공간, 다산정원(茶山庭園) 1㎞ 남짓한 호젓한 오솔길 걸으면서 느끼는 자연정원 제자 양성과 창작의 산실 자연·사람 소통 방법 제시 당시 풍경 시서화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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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강진출생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8년이라는 세월을 강진에서 보냈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포(經世遺表) 등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남양주시를 가리킨다. 정약용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다산(茶山)이고 또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다산초당은 언제부턴가 다산유적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정원(茶山庭園)하면 다산초당에 주목하게 된다. 그 주변에 다산사경(茶山四景)이 모여 있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다. 다산초당의 경물(景物)은 다조(茶), 약천(藥泉), 정석(丁石), 석가산(石假山) 등 네 가지를 가리키는데 이들을 읊은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서첩으로 남아 있다. 사경(四景)가운데 ‘다조’는 차 끓이는 부뚜막 역할을 하던 바윗돌로 현재 다산초당 앞마당에 놓여있다. ‘약천’은 다산이 평소 떠 마시거나 약을 달일 때 사용하던 샘(井)으로 다산초당 왼쪽 뒤편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정석’은 다산이 자신의 성을 직접 새긴 것으로 다산초당 왼쪽 언덕배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바위는 다산초당의 명패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단골 인증 샷 장소가 되고 있다.
 또 ‘석가산’은 다산초당 오른쪽 연못 중앙에 둥근 형태의 산 모양으로 돌을 쌓아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신선사상에 근거하는데, 낙원을 상징하는 선산(仙山)을 쌓은 것으로 대자연을 정원 속으로 끌어들이는 수법이다. 다산은 신선사상에 입각한 자연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자연관으로 발전시켰다. 말하자면 자연과 생활이 융합된 실용적인 정원 가꾸기를 통해 자연과 사람간의 소통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그와 그의 제자들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은 당시 풍경을 시서화(詩書畵)로 기록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청했다. 이곳 풍광을 노래한 저서로는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다산십이승첩(茶山十二勝帖) 등이 있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 다산초당의 풍광이나 공간배치 변화과정도 알 수가 있는데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도(茶山圖)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려 있는 다산이 지은 다산팔경사를 보면 당시 풍경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제1경 불장소도(拂墻小桃:담장가의 작은 복숭아나무), 제2경 박렴비서(撲簾飛絮:주렴으로 날아드는 버들개지), 제3경 난일문치(暖日聞雉:따뜻한 날 들리는 꿩 울음소리), 제4경 세우사어(細雨飼魚:보슬비 내릴 때 물고기 먹이 주는 풍경) 제5경 풍전금석(楓纏錦石:비단바위를 휘감은 단풍나무), 제6경 국조방지(菊照芳池:국화꽃 투영되는 아름다운 연못), 제7경 일오죽취(一塢竹翠:언덕배기 대나무의 푸르름), 제8경 만학송도(萬壑松濤:골짜기마다 소나무 일렁이는 소리) 등 다산초당 주변의 일상풍경을 함축적인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도 2500여 수가 넘는 방대한 다산의 시집에는 당시 다산이 자연과 어떻게 소통했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다산은 불가피하게 숲 속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연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고 많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며 숲을 정원처럼 가꾸며 제대로 누린 것이다. 지금 다산 초당 주변에서 꽃들을 별로 찾아볼 수 없지만, 다산이 얼마나 꽃을 좋아했는지 그 이야기는 다산화사(茶山花史)라는 시를 통해 전해진다. 그저 주어진 자연풍경을 즐기고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연못을 파서 물을 담아두고 관조(觀照)했으며 정원용수(庭園用水)로 활용하거나 비상시 화재를 대비한 소방용수 기능도 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채마밭에 채소와 유실수를 가꾸어 실용정원으로 활용했다.
 다산이 유배 오기 전 한양생활 당시에도 그의 꽃 사랑이 유별났고,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 내용은 죽란화목기(竹欄花木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의 집이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서울 명동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높은 벼슬아치와 세력 있는 집안들이 많아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날마다 한길(골목길)을 서로 달린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완상(玩賞)할만한 연못이나 정원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 뜰을 반 정도 할애하여 경계를 정하고, 여러 꽃과 과일나무 중에서 좋은 것을 구하여 화분에 심어 그곳을 채웠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진에 귀양 온 후에도 아들에게 보낸 편지나 가계(家誡, 자식에게 주는 훈계를 적은 글)에도 원포(園圃:과수원과 채원) 가꾸는 일에 대한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다산정원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바탕으로 한 제자양육과 창작의 산실이었던 다산초당을 비롯하여 서암(西庵), 동암(東庵) 등이 있다. 또 둘째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강진군에서 세운 천일각(1975년) 과 해월루(2006년)도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일대의 조망이 일품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약 1㎞ 정도 되는 다산초당과 백련사(白蓮寺)를 잇는 호젓한 숲 속 오솔길은 다산과 그의 제자들에게 최고의 산책길이자 창작의 기운을 샘솟게 한 지혜의 정원이었다.
 이 숲을 걸어보지 않고서는 다산정원의 참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길에서 만나는 각종 꽃과 나무, 누정, 야생차밭, 새소리, 바람소리, 게다가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오는 신비로운 햇살까지 경험하고 나면 이곳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정원이었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다산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산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걷다보면 꽃과 나무들이 길동무가 되어주고 산새들이 길을 안내한다. 정원은 한 곳에 꽃과 나무, 연못, 누정 등을 조성하여 감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 정원이 어떤 주제이고 정원주인의 성향은 또 어떠한지를 대략 가늠하게 된다.
 하지만 다산정원은 좀 다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천천히 자연을 느껴봐야 비로소 정원의 실체를 알 수 있다. 다산은 한곳에 정원의 요소를 다 모아 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최대한 정원의 요소로 끌어들인 것이다. 다산은 그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오솔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 지인들과 더불어 그저 터벅터벅 그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는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활용할 줄 하는 노련한 정원사였다.
 

다산의 애제자 황상과 삼근계, 그리고 일속산방
 황상(黃裳, 1788-1863)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 다산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했던 다산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그리고 삼근계(三勤戒)는 다산학문의 기본정신인 근면(勤勉)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한 내용이며, 일속산방(一粟山房)은 다산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제자 황상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삶의 표상(表象)같은 것이다.
 다산이 강진에 처음 유배를 왔을 때 딱히 갈 곳 없던 자신을 흔쾌히 맞이해준 주막집(사의재四宜齋) 여주인의 간청에 따라 인근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때 유독 눈길을 끈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황상이다. 일주일 후 다산은 황상에게 글 한편을 써 주면서 문사(文士)에 정진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는 수줍은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이에 다산이 말했다. “학문은 좀 한다는 자들에게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 하면 재주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고, 둘째 글재주가 좋은 사람은 속도는 빠르지만 글이 부실하게 되는 폐해가 있으며, 셋째 이해가 빠른 사람은 한번 깨친 것을 대충 넘기고 곱씹지 않으니 깊이가 없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다산은 “둔한데도 계속 열심히 하면 지혜가 쌓이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순탄해지며, 답답한데도 꾸준히 하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고 말하며 그를 격려했다. “둔한 것이나 막힌 것이나 답답한 것이나 근면하고, 근면하며, 근면하면‘ 모두 풀린다.”는 것이 다산의 삼근계(三勤戒) 가르침이다. 황상은 열다섯 살에 이 말씀을 들었는데 60년이 지난 일흔다섯에 임술기(壬戌記)라는 글을 통해 되새긴다. 일생동안 얼마나 스승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한번은 황상이 다산에게 은거(隱居)하는 자의 거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다산이 명나라 말기 초야에 묻혀 살던 황주성(黃周星)의 ‘장취원기(將就園記)’에 대해 황상에게 들려주자 황상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스승에게 아뢰었다. 장취(將就)라는 말은 시경(詩經) 방낙(訪落)에 나오는 “장차 나는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길을 이어 더욱 빛내리라.” 라는 뜻의 ‘장여취지 계유판환(將予就之 繼猶判渙)’에서 따온 말이다. 장취원은 앞으로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만들 수 없는 상상 속의 정원을 뜻한다.
 이때도 다산은 제자를 위해 긴 글을 써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은자(隱者)의 정원에 대해 들려주었다.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이 바로 그것이다. “땅을 고를 때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강과 산이 어우러진 곳은 시내와 산이 어우러진 곳보다 못하다. 골짜기 입구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어야겠지. 조금 들어가면 시계(視界)가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런 곳이라야 복지(福地)다… ”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늘그막에 강진군 대구면 천개산(天蓋山) 자락 백적동(白洞)에 비로소 자신만의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만년에 스승의 가르침에 걸맞게 ‘일속산방(一粟山房)’이라고 명명하였다. “일속산방은 좁쌀 한 톨 만한 오두막”이라는 뜻이다. 그는 일속산방에 기거하며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는 다산 시풍을 계승하며 ‘치원유고(園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다산은 가끔 일속산방을 찾아가 황상이 지어준 조밥에 아욱국을 먹고 시를 쓰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일속산방은 다산이 황상에게 써준 제황상유인첩, 즉 장취원기의 취지를 그대로 살린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아쉽게도 당시 일속산방의 풍경을 볼 수 없지만 다행히 소치 허련(小癡 許鍊)의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일속산방(一粟山房)은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황상의 곧은 선비정신은 물론이고 마땅히 지향해야할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 함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광주전남 연구원 문화관광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