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가 한 집안서 세 사람 나오니

고종 \"효자각 지으라\"에 三孝門 건립 김덕진의 종가 이야기 영광의 연안김씨 직강공파 영광 군남면 동간리 민속문화재 제234호 연안김씨 종택 김인택, 풍수지리 \'매화꽃 떨어지는 형국\' 찾아 터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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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이라는 명당에 터를 잡다.

영광군 군남면 동간리는 제법 넓은 평야가 보이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연안김씨의 집성촌이다. 그곳에 중요민속문화재 제234호(1998년 지정)인’영광 연안김씨 종택’이라고 불리는 옛집이 우뚝 서 있다. 19세기 말기에 지어진 집에 대한 이야기로 종가 유래를 알아보겠다.

이 집은 불갑면에서 살던 김인택(金仁澤, 1575~1666)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또는 ‘학 형국’이라고 불리는 길지를 찾아와서 터를 잡은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가족들이 이산하는 아픔을 겪은 그가 새로운 삶터를 찾은 곳이 바로 동간리였다. 그러니까 이는 한 500년 역사를 지닌 종가인 것이다.

대문 앞에 이르면 여느 집과는 다르게 마당이 매우 넓다. 그 마당을 집안에서는 ‘정마당’이라고 하는데, 콩 같은 잡곡을 널고 터는 등 여러 농사일에 사용되었다. 대문을 마주본 자세로 왼쪽에는 마부집, 화장실, 안내문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말을 타고 내릴 때 발을 딛었던 ‘하마석’이 있다. 고개를 들면 여느 집 대문과는 완전히 다르게 남자들 탕건처럼 생긴 2층집 대문이 우뚝 서 있다. 현재의 종손 김성호(金性浩, 1934~) 옹은 입향조 김인택의 15대손인데, 대문 누각에 대한 추억을 “옛날에 어릴 때는 거기서 놀고, 여름에는 문을 활짝 열러 놓고 피서하고 그랬던 곳이에요”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이 집 김씨가의 위세나 족적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 우뚝 솟은 2층 누각의 삼효문 대문, 한국에서 보기 드문 문화유산

대문의 2층 누각을 자세히 보면, ‘삼효문(三孝門)’이라고 적혀 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효자가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이나 나왔으니 효자각을 지으라는 고종의 명에 의해 삼효문을 지었고, 현판은 고종의 형 이재면이 썼다고 한다. 대문과 효자정려를 하나로 한 것인데, 효자 선양의 극대화를 위한 조치로 좀체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세 효자란 김인택의 아들 김전(1599~1680), 6대손 김재명(金載明, 1738~1778), 8대손 김함(1760~1832)을 말한다.

수은 강항의 문인인 김전은 70세에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렸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하여 효자로 명정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그에 감복받았는지, 그의 아들 김훤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좌부승지까지 올랐다. 김훤의 아들 김재명은 부모를 공경했으며 시묘살이 중 호랑이가 밤이면 나타나 짐승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주면서 지켜주었고, 이 사실이 영광 원님에게 알려져 효자가 되었다. 김함은 효행이 탁월하여 한 겨울에 두꺼비를 구하여 부모의 병환을 치료하여 효자가 되었다.

대문은 2칸인데, 한 칸은 돌 문턱으로 된 큰 문이고, 또 한 칸은 나무 문턱으로 된 작은 문이다. 남녀와 상하에 따라 출입했음에 분명하다. 대문을 지나면 사랑채와 중문이 나온다. 7칸 규모로 1898년(고종 35)에 건립된 사랑채 앞에는 정원이 꾸며져 있다. “나 어렸을 때에는 영산홍하고 자산홍 두 그루가 있었는데 영산홍은 작년에 고사해서 자산홍만 있어요”라고 종손은 말하였다. 사랑채에는 ‘매간당(梅澗堂)’, ‘익수재(益壽齋)’, ‘구간재(龜澗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종택을 짓고 매득과 식리로 재산을 늘린 세 효자들

매간당은 김인택의 10대손 김사형(金思衡, 1830~1909)의 호이고, 익수재는 11대손 김혁기(金赫基, 1851~1897)의 호이고, 구간재는 12대손 김종관(金鍾琯, 1870~1943)의 호이다. 김사형은 어머니 진주 강씨와 함께 종택을 지었는데, 그때 도편수가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자는데 용이 대들보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런 꿈은 처음이라 도편수가 앞으로 이 집안에 부귀영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예언은 적중하여 위 3인은 기존의 재산을 유지ㆍ관리하면서 적극적인 매득과 식리 활동을 통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큰 재력가가 된 것이다.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 아래채, 곳간채가 나온다. 7~8칸에 이르러 규모가 큰 안채는 1868년(고종 5)에, 아래채는 1942년에 건립된 것이다. 많은 가족들이 안채에서 거처하였고, 앞 마당에서는 농삿일을 하였다고 한다. 안채 우측에 있는 곳간에는 대가족의 식량으로 소비되는 쌀을 몇 가마씩 저장하였다. 곳간채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그와 관련하여 종손은 “거기는 디딜방아가 있었던 곳이예요. 천장에다가 디딜방아를 매달아 옛날에 떡 같은거 찧어가지고 떡도 만들고 그랬던 곳이예요”라고 말하였다. 안채 뒤편에 뒤주를 두고 곳간에서 한두 가마씩 넣어두었다. 문을 통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였으니, 이 역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 지금은 좀체 보기 드문 두 채의 초가 호지집

안채 왼쪽을 돌아서 들어가면 19세기 말기 건축물로 추정되는 사당, 서당, 연못, 마굿간 등이 있다. 사당은 3칸 규모인데 과거에는 후원이 넓게 구성되어 있었다. 초당이라고 불리었던 서당에서는 문중 사람들이 공부하였다. 이 초당에서 김옹의 증조부 김종관이 4서3경을 공부하면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읽어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종묘 제사에서 축문을 쓰고 독축을 하였으며, 민영환이 자결하였을 때에는 피 묻은 옷에서 혈죽이 났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라는 왕명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서 지금은 죽고 없는 큰 노송이 가에 있었던 연못, 안채와 떨어져 있어 일꾼들이 물트러 다녔던 우물, 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지내던 마굿간 등이 있다. 마방간이라고도 한 마굿간에는 말이 네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종손 증언). 뒤뜰로 가면 초가로 된 호지집이 한 채 있고 담 너머에도 또 한 채가 있다. 호지집은 머슴들이 살았던 집으로 여기에서는 호제집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는 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초가집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가치가 있고, 오늘날 보기 힘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5ㆍ16 이후 낙향하여 마을발전에 기여하다.

현 종손의 조부인 김창영(金昌泳, 1898~1964)은 일제의 통치에 반발하여 신학문을 거부하고 한문을 독학함으로써 선대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였다. 경제적으로도 무단통치 속에서 종가의 가산이 적몰되었지만 이를 끝까지 환수 받아 종가의 자산을 수호하고 유지하였다.

현 종손의 부친인 김석주(金碩柱, 1916~1980)는 일본 유학을 통해 신문물을 습득하였고, 해방 정국에는 정계에 투신하여 전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를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청년 계몽운동과 마을발전에 힘써 마을회관을 짓고 땅을 내서 길을 만들었다. 농사를 지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뒤에 마을 사람들이 동간리 마을회관 앞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가훈인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김씨들은 현달한 인물도 없이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현재 종손과 종부가 연로하여 예전처럼 활동을 할 수 없으니, 향후 변화 상황이 주목될 수밖에 없다.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동간리 연안 김씨 사람들은 4천여 점에 이르는 많은 고문서, 100여 점에 이르는 관복ㆍ호패 등의 유품을 남겼다. 이 고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3년에 ‘고문서집성 104 영광 연안김씨 고문서’라는 이름으로 영인, 출판하였고, 이를 토대로 연구논문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