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이란 신분은 같지만 그 모습은 180도 다르다. 이는 범법자와 의인의 큰 간격에서 비롯된다. 하필이면 의인을 기리는 ‘안중근 의거 109주년’인 10월26일 ‘문재인 퇴진과 국가수호를 위한 320인 지식인 선언’이 나왔다.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집권 세력의 행보에 대해 진영과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나름 그런 의견을 무조건 배격할 수도 없다. 집권세력은 당연히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당당해야 할 ‘지식인 선언’ 참가자 명단은 보안상 이유로 전부 공개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수인의 데자뷰(dejavu)를 느낀다.
이리도 수줍게(?) 참여자 명단을 발표하지 못하는 ‘지식인 선언’을 보며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를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고 갈파한다. 여기에는 위험에 굴하지 않는 지조와 기개가 필요하다. 19세기 지식인의 표상인 에밀 졸라는 엄청난 역경을 각오하고 ‘나는 고발한다’고 외치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일제 강점 하에 ‘3.1절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33인과 서슬 퍼런 유신치하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지식인은 당당히 이름을 밝히며 독립과 민주화를 외쳤다. 진실을 알린다는 자기 신념이 강한 지식인은 뒤로 숨지 않는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서대문 형무소와 남산으로 끌려갈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드러냈다. 지식인은 인터렉츄얼(intellectual)이라 한다. 전문가(professional)와 다른 개념이다. 학식과 지위가 높다고 지식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고학력자와 엘리트는 넘치지만 지식인은 드물다. 지식인의 덕목을 갖추지 못하면 정치인, 교수, 의사, 변호사 등은 그냥 전문가로 불린다. 그만큼 지식인이란 이름은 무게가 다르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자칭 지식인들은 ‘지식인 파노플리 효과(panoflie effect)’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구찌, 루이비통 같은 명품을 걸치면 상류층과 한 부류라는 연대를 느끼는 착각처럼 선언의 대열에 숨어 허명을 얻으려는 부박함이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던 사이비 역사학자, 교육부 관료와 다를 바 없다.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지식 전문가에게는 지식인의 칭호를 부여할 수 없다. 굳이 320인의 충정을 이해하더라도 지식인이란 이름을 빼고 그냥 ‘나라를 걱정하는 우리들의 선언’ 정도로 하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문재인 퇴진을 주장하는 보수 선언’정도도 괜찮을 것 같다.
호칭 인플레 시대이긴 하지만 아무나 ‘지식인’을 참칭(僭稱)해서는 안 된다. 이 원고를 쓰는 내가 스스로 유명 논객 또는 문호(文豪)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현시대에 지식인은 죽었다’는 풍문이 돌지만 그렇다고 개나 소나 지식인을 자처할 일은 아니다. 지식인을 자칭하고자 한다면 장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김병익의 ‘지식인의 괴로움’을 먼저 읽을 일이다. 늦가을 긴 밤에…….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