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진동 -임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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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진동 -임요희-
  • 입력 : 2010. 01.01(금) 00:00
그림 / 한희원


그 순간 나는 좁은 상자를 빠져나오기 위해 벽에 몸을 부딪는 조그만 존재들을 상상했다. 두 쌍의 투명한 날개와 견고하고 뾰족한 주둥이, 털이 숭숭 박힌 다리를 잔뜩 거느린 존재들이 잠깐 동안의 고요한 삶을 박차고 일제히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그들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나는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길고 집요하게 이어지는 웅웅거림을 견뎠다. 벽시계의 야광바늘이 두 시를 가리켰다. 흔들어 깨운다 해도 그렇게 빨리 정신이 들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잠을 홱 벗겨가는 것 같았다. 남편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진동은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아닙니다."
 남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통화를 마치자 툭, 휴대폰을 머리맡에 던져놓았다. "잠 다 잤네." 두 손을 깍지 끼어 머리 밑에 괴었다. 남편은 정말 잠을 다 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서 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편의 휴대폰으로 이상한 내용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 6개월 전이었다. 모 이동통신회사 대리점에서 휴대폰을 무상으로 구입한 시점과 같았다. 무상과 구입이라는 단어를 함께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사실이었다. 휴대폰 값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 공짜는 아니었다. 새 번호를 받는 조건이었고 약정이 있었다. 번호를 포함해서 1년간 통신회사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제 값을 다 치른다면 양복 한 벌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새 휴대폰은 밀크 초콜릿을 연상시켰다. 짙은 갈색이었고 두께감이 없었다. 최신형은 아니었지만 남편이 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기종이었다. 새 번호의 끝자리가 6942였다. '6942'를 구입한 날부터였다. 내용은 같지만 형식은 약간씩 다른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
 "보도방이죠?"
 "아가씨 한 명 부탁합니다."
 "여자 둘 보내주쇼."
 밤마다 그랬다. 새벽 두 시면 더욱 집요해졌다.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고 잤지만 소용없었다. 전화번호가 문제였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남편 친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고 했다. 어디서 이렇게 야한 번호를 구한 거야? 번호 한번 화끈하군, 6942라니.
 육구사이, 내가 태어난 해는 1969년. 역사 이래 그보다 멋진 해는 없었다. 그 해에 아폴로 우주선이 달나라에 착륙했다. 인간이 하늘의 땅을 디딘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굉장히 멋진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굉장히 야한 연도에 태어나셨군요'라는 말에 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69라는 숫자에서 아폴로 대신 콩나물을 떠올렸다. 콩나물 두 개 중 하나를 거꾸로 놓으면 69가 되고 사람을 같은 식으로 배치하면 체위가 된다는 것. 그런 체위를 교환하는 사이가 6942였다. 점잖게 말하면 거리낌 없는 사이지만 바람직한 사이라고 말해도 될지 어떨지는 망설여졌다. 야간 업소에 여자를 대주는 연락책의 번호로는 나쁘지 않았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피가 기도를 타고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바꿔. 위약금을 물어주고서라도 바꿔!"
 우리가 만만하게 보여서 그런 번호를 준 걸까, 우리 행색이 지나치게 얼뜨고 순해보였던 걸까, 입성이라도 좀 좋은 걸 입고 있었으면 다른 번호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들. 모르고 그랬든, 악의였든 간에 나는 그런 번호를 골라준 대리점 직원을 증오했다. 그런 번호를 없애지 않은 부주의한 통신회사를 증오했다. 무엇보다 대리점을 나오면서 그들에게 고개 숙여 절까지 했던 우리 네 식구의 멍청함을 가장 증오했다.
 번호를 포함해서 휴대폰까지 통째로 바꾸라는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은 휴대폰을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약정 위반에 따른 변상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번호에는 우리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었다.
 휴대폰을 무상으로 구입하는 조건으로 남편에게 6942가 부여된 다음 날이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드디어 자리가 났다는 이야기였다. 어디 좋은데 자리 잡아놓을 테니 따라 나오라고 하던 선배였다. 남편과는 각별한 사이였던 데다 희떠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남편은 그의 연락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는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던 상태였다. 형식상으로는 차이가 있겠지만 무너질 거라는 내용만큼은 확실하던 직장이었다. 업무량에 비해 월급도 적었다. 그만둘 이유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결정적으로 남편은 일관성 없는 회사의 인사 체계에 불만이 컸다. 학연, 지연으로 연결된 그들의 선후배가 회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남편은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입사시험 따위의 번잡한 요식행위 없이 하루 들러 면접이나 보고 당장 출근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사무 자동화 설비를 개발하는 회사였다. 그 바닥에서는 제법 탄탄하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주가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감색 슈트에 줄무늬 넥타이를 두른 남편은 새신랑처럼 근사했다. 신제품은 아니었지만 전부터 남편이 입고 싶어 하던 스타일이었다. 비좁은 바지통에 스리버튼 상의가 남편의 마른 체형에 똑 떨어졌다. 잔줄무늬가 세로로 들어간 것까지 남편은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세일 상품이었으니 망정이지 제값 주고 샀으면 최신형 휴대폰과 맞먹을 가격이었다.
 결제는 카드로 했다. 그 달 들어 유난히 카드를 쓸 일이 많았지만 곧 남편이 직장을 잡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 편하게 질렀다. 마음이 편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현찰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 옳다. '선택'은 결제에 앞서 구매 여부를 논할 때 필요했다. 그동안 입던 양복은 어깨 품이 넓은데다 '투 버튼'이었다. 이제 그런 스타일의 옷은 구식이었다. 5년이면 본전은 뽑았다는 생각이 우리 부부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양복을 사놓고도 여러 날이 지났는데 선배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선배의 장담으로 보면 벌써 출근해서 월급날만 기다릴 시간이었다. 나의 채근에 남편이 휴대폰을 들었다. 선배는 지체하지 않고 받았다.
 "어, 나 지금 미국에 출장 와 있다. 중대한 건에 크레임이 걸렸어. 금방 돌아갈 거야. 여긴 지금 한밤중이다. 귀국하는 대로 출근 조치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미국이라는데도 휴대폰 밖으로 선배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새어나왔다. 새 휴대폰의 성능이 지나치게 좋아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미국'은 거리감이 사라졌지만 선배의 존재는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원래 그 선배는 자분자분 말을 잇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개조한 듯 호탕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대답이 도리어 불안감을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느 정도 안도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출근에 대비해 몸을 만들겠다고 했다. 전보다 일찍 일어났고 안 하던 조깅도 시작했다.
 
 시장에 다녀오는데 우편물이 와 있었다. 발신지를 확인하는 남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남편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거칠게 빼앗았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편지를 뜯었다. 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두 뺨을 간질이는 오후, 이 어미는 불철주야, 가족을 위해 타지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펜을 드노라.
 계절과 건강에 관련한 일장 연설을 끝낸 후에야 어머니는 본론을 적어 내려갔다. 아무리 심각한 내용이라 해도 요식 행위 없이는 절대 편지를 이을 수 없는 어머니는 또래의 여학교 출신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엄숙한 문장을 나열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했을 게 틀림없었다. 편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버지의 빚이 또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건은 컸다. 2000만 원이었다. 아버지가 서명한 차용증서가 딸려 있었다. 뒷집 무동이네서 빌린 돈에 이자가 붙었다는 것이다. 지방을 돌며 장사를 하는 무동이네는 몇 년에 한 번씩 고향에 들렀다. 이번에 고향집을 팔면서 묵은 빚도 정리하겠다는 취지였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의 낯빛으로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턱까지 덜덜 떨었다. 이번 빚은 우수리 없이 딱 떨어지는 2000이어서 계산도 어렵지 않았다. 누적 빚의 합계가 4584만원이 된 것이다. 요실금 환자의 소변처럼 시간을 두고 질금질금 새어나온 게 그랬다. 우리 집 전세금과 맞먹는 액수였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그대로 집을 뛰쳐나간 남편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두고 가는 바람에 연락도 되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되었지만 아가씨를 부탁하는 전화도 없었다. 차라리 그런 전화가 걸려와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제력을 잃고 함부로 카드를 긋고 다녔을까봐 그게 더 걱정이 됐다.
 남편은 동이 틀 무렵 돌아왔다. 기운은 없어보였지만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트레이닝복을 가지런히 개서 머리맡에 둔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살며시 일어나 남편의 트레이닝복을 뒤졌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 지갑이 있었다. 지갑에서 가지런히 꽂힌 카드 몇 개와 운전 면허증, 그리고 천 원짜리 석 장이 나왔다. 전날 그의 지갑에는 만 원짜리가 하나 더 있었다. 단지 만 원만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이 나오는 한편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지, 시금치 한 단, 고등어 한 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만 원짜리와 교환 가능한 마트의 상품이었다.
 "아버지에게 신용이 있었다는 거 아냐?"
 자는 줄 알았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재산이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잖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 사람들도 빌려줬겠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꾸며낸 말 같지는 않았다. 절망한 나머지 남편이 망상 단계에 접어든 게 확실했다. 재산이 있었으면 수해로 무너진 담장을 그대로 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비현실적으로 자존심이 센 사람이어서 담장을 고치기 전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그걸 고치지 못해 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있는 대로 구박을 받았다. 무너진 담장은 재산이라 부를 것도 없는, 푼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편이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6942라고 한 번 되뇌었다. 낯선 물건인 것처럼, 혹은 침입자를 보듯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잠시 후, 휴대폰이 포르릉 하고 삐낀 소리를 냈다. 그것은 남편이 일시적으로 6942와 이별을 고하는 소리였다.
 이대로 6942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선배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한번 미뤄진 약속이 지켜지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선배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 아버지의 숨겨진 재산을 바라는 것보다는 상식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휴대폰 하나 잠재우는 일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휴대폰 다시 켜 둬. 미국은 지금 낮이니까 무슨 연락을 해올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버지 재산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마."
 내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음 날부터 남편은 다시 6942에 매달렸다. 여기저기 수소문 하는 것 같더니 고향 후배와 연락이 닿은 모양이었다. 말이 후배지 그런 양아치들, 하며 남편이 말도 섞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읍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비에 말려들어, 있는 대로 부모 속을 썩이던 '인간 말종들'이었다.
 "그래 그래, 잘 뒤져 봐. 탐문을 하다 보면 우리 아버지가 묻어 둔 땅이 나올 거야. 동네 어르신네나 그 가족들한테도 다 물어보고, 그래. 반땡 치자니까. 찾는 대로 무조건 반 갖는 거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거래였다. '인간 말종들'과 단순하게 말을 튼 게 아니라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검은 커넥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심장이 떨려 그 자리에서는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인간들을 믿어?"
 "돈이라면 눈깔이 뒤집히는 녀석들이야. 남실이네 땅도 찾아냈잖아. 남실이 아버지가 차명으로 해 둔 땅, 걔네들이 다 찾은 거야. 해낼 거야."
 남편은 확신에 차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남편의 확신에, 호스 째 휘발유를 들이댄 사람은 어머니였다.
 "있다. 틀림없이 있어. 그대로 갈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 별명이 쥐새끼 아니었냐. 어디 야무지게 한몫 챙겨 놨을 거다. 생각해 보니 새마을 금고에서 돈 빌릴 때 저당 잡혔던 땅도 있었지 아마. 잘 찾아보면 더 나올 거다."
 두 사람의 망상 앞에서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땅이야 오래전에 처분해서 빚잔치에 다 썼다는 걸 어머니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쥐새끼'는 왕대포, 미꾸라지를 제치고 어머니가 가장 끔찍해 하는 아버지의 별명이었다. 돈 앞에서 서슴없어진 어머니를 보자 인간의 소망이란 게 더없이 참혹하고 처절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기세라면 바다를 메워서라도 땅을 만들어 낼 것 같았다. 부쩍 휴대폰 속 벌레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보도방이죠?"
 "형님, 드디어 단서를 잡았심더. 은칠이네가 갑자기 서울로 떴심더. 구린 게 있으니까 튄 거 아닙니꺼? 지구 끝까지라도 추적해 보겠심더."
 "아가씨 한 명 부탁합니다."
 "형님, 진행비 쪼매 부탁합니더."
 "빨리 여자를 보내란 말야."
 내가 보기에는 전부 심란한 내용뿐이었다. 후배라는 사람은 목돈을 찾는 일보다 남편으로부터 푼돈을 긁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카드가 연체되어 돈 나올 구멍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남편은 어떻게든 '진행비'를 만들어냈다. 어머니 고쟁이에 든 비상금까지 긁어 오는지도 몰랐다. 어머니도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사채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간간이 걸려오는 선배의 전화 내용도 별다르지 않았다.
 "여기 일은 잘 해결됐다. 내일 저녁 비행기로 간다. 어서 출근할 준비나 하라구."
 그것은 출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모든 일이 다 풀린 것으로 믿었다. 간절한 바람은 성찰을 방해한다. 나로선 생계가 막막하다는 사실보다 선배라는 사람의 행동거지에 따라 울고 웃게 된 상황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일면식 없는 유흥업소의 주인들, 그가 철석같이 믿는 선배, 과거에는 '인간 말종'이었지만 지금은 말과 거래를 한꺼번에 튼 후배, 온갖 내용의 전화에 남편은 상냥하게 응대했다. 곧 일확천금이 손아귀에 굴러 떨어지고 번듯한 직장이 생길 거라는 사실에 터럭만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4000만 원이 넘는 부채와 카드빚 쯤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가 받은 전화라고는 아가씨를 부탁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은칠이네를 찾은 건지 못 찾은 건지 후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귀국했는지 어떤지 소식이 없기는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하루 종일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휴대폰을 붙들었다. 선배는 금세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반색까지 했다. 전화를 기다렸던 게 오히려 그쪽 같았다.
 "아, 미안 미안, 우리 팀에서 추진하던 사업에 제동이 걸렸거든. 인원 보충에 차질이 생겼어.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우리 팀이 안 되면 다른 부서에 꽂아줄 테니."
 선배의 목소리는 조금 더 커져 있었고 더 자신만만했다. 남편은 여전히 선배를 믿는 눈치였다. 믿자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믿음직한 구실이 따라붙는 법. 남편은 선배의 사정을 헤아리기로 했다. 채근할 입장도 아니었거니와 후배 때문에 그럴 여력도 없었다. 놈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서 무슨 사고를 쳤는지 며칠 째 잠수 중이었다. 후배를 찾아낼 능력 있는 잠수부를 따로 고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가씨를 부탁하는 전화는 끊임없이 걸려왔다. 아닙니다. 잘못 걸었어요.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싶어 돌아보니 남편이 6942의 목숨 줄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이런다고 될 일이 안 되겠어?"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건지, 모든 걸 포기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의 밤은 평안했다. 소리라고도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소한 진동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침까지 푹 잤다. 하지만 날이 밝고, 6942를 다시 소생시키면서 남편은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화장실에 있다가도 후다닥 뛰쳐나왔다.
 "방금 전화벨 울렸지?"
 낮잠을 자다가도 금방 눈을 떴다. 남편은 잠꼬대 하듯 물었다. "전화벨 울렸지?"
 전화가 오기는 왔다. 카드 회사에서 독촉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님, 저희 형편도 좀 봐 주십시오. 이번 달까지 어떻게 이자만이라도 부탁합니다. 그들이 사정조로 나오는 바람에 남편 대신 전화를 받을 때마나 난감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강압적으로 나왔더라면 핑계 김에 나도 악을 쓰고 대들면서 숨통을 틔웠을 것이다. 벌레에 물린 것 같은 붉은 반점이 남편의 뺨에 돋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손톱 만하던 반점은 금세 동전 만해졌고 손을 댈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연고를 발라도 소용없었다. 깎지 않은 수염과 퀭한 눈초리, 초점 잃은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남편을 피했다.
 그런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내가 돈벌이에 나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린이집 같은 기관도 생각해 봤지만 두 살, 네 살짜리 녀석 둘을 위탁하는 액수보다 내가 넘겨 벌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선배는 여전히 핑계를 대며 그를 구원하는 일을 미루었다. 후배 역시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은칠이 찾는 일을 미루었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일의 해결을 졸라댔다.
 '유산포기 각서'를 쓰면 조상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그런 게 가능한 시점은 한참 지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지 벌써 네 해가 지난 것이다. 빚은 네 해에 걸쳐 야금야금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유산을 포기를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와 남편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숨겨진 땅 때문이었다. 그게 발견되면 그깟 빚 쯤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남편은 새 차를 구입할 것이며 커다란 평수의 새 집을 살 것이고 제 값 주고 최신형의 휴대폰을 구매할 것이다. 더 이상 아가씨를 찾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될 것이고 무능한 선배의 전화 역시 과감하게 사절할 것이다. '인간 말종들'과 연락을 끊을 방도 역시 그 길이 유일했다. 땅만 발견되면 최신 제품으로 양복을 해 입을 것이고 고단한 아내를 위해 오전 시간 동안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길 것이다. 어머니 집 담장을 고쳐 주고 베란다 새시를 새로 해 줄 것이며 욕실도 개조해 줄 수 있는데 어떻게 그 땅을 포기하란 말인가.
 "그린데요 형님, 제발 번호 좀 바꾸이소. 번호가 그기 뭡니까."
 번호가 고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6942는 성능 하나는 높이 살만 했다. 스피커폰도 아니고 통화 내용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휴대폰이라니.
 "은칠이를 찾았다는 거야, 못 찾았다는 거야?"
 남편이 비로소 화를 버럭 냈다.
 "은칠이는 찾았는데요, 은칠이가 아닙니더."
 "그게 무슨 소리야?"
 "제 말 끝까지 들어보이소, 은칠이는 아니지만 그 은칠이가 기가 막힌 정보를 가르쳐 줬심더. 효심이 알지예, 효심이 어머니가 형님 아버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합니더. 효심이 어머니한테 건너간 폐물이 한 트럭분이랍니더. 그기를 족치면 뭔가가 나올 것 같심더. 곧 착수하겠심더. 평안한 밤 되이소."
 돈을 못 찾았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효심이 어머니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남편은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넋이 나가 있었다. 땅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만 흘리던 남편이 갑자기 벽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아이들이 내 품에 꼭 달라붙었다. 남편의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불쌍해. 아버지한테 가락지 하나 받아보지 못했는데..."
 어머니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남편이 화가 난 것은 효심이 때문이었다. 효심이는 턱이 뾰족하고 눈이 큼지막한 소위 도시형 미인이었다. 명절 때 내려갔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를 향해 샐쭉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났다. 효심이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한 동네서 나고 자라 도시로 유학 가기 전까지 매우 가까웠던 사이였다. 남편은 자신의 추억까지 훼손시킨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천정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던 남편이 어느새 코를 골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코를 골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다친 손등이 그의 배 위에 얌전하게 올라가 있었다. 어느 새 붉은 반점이 손등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그의 손은 전투가 귀찮아진 늙은 투견처럼 보였다. 붉은 반점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편의 두 뺨을 거의 뒤덮고 있었다. 벌레에게 종일 뜯긴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의 골까지 깊어져 남편의 얼굴은 영락없는 중늙은이였다. 상처와 반점으로 얼룩진 얼굴에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대단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흘려보내면서 그는 빨리 늙고 싶은 것인지도. 어서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아내가 돈을 벌러 나가고, 국민 연금을 타고, 자식들을 채근해 용돈을 탈 날만 기다리는지도.
 새벽 두 시가 되자 우리는 또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형님, 자금 좀 부탁합니더."
 "아가씨 한 명 부탁합니다."
 이상한 것은 후배와 유흥업소 사장, 두 사람의 목소리가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투리와 표준어라는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어조와 톤이었다. 휴대폰 밖으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란 게 애, 어른의 구별조차 어려운 법이긴 하지만 순간적인 느낌은 그랬다. 혹시 후배 녀석이 장난치는 것 아냐? 내 말에 남편이 입을 비틀며 웃었다. 내가 남편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남편도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날이 밝자마자 남편은 114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선배가 다니는 회사 연락처가 전화번호부에 등재되어 있었다.
 "네에?"
 남편이 놀라는 순간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일주일 전에 그만두셨습니다."
 "하지만 제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시기로 했는데요. 그것만 기다리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남편이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사정조로 말하는 것을 처음 봤던 것이다.
 "다음 달에 저희 회사에서 공채모집을 합니다. 거기 응시해 보십시오."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남편은 부리나케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과연 공채 모집 광고가 큼지막하게 떠 있었다. 연령 제한이 없을 뿐더러 '경력자 우대'라는 희망찬 조항까지 붙어 있었다.
 "바로, 이거야."
 남편이 엄지와 중지를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진즉 그런 거나 알아볼 일이지, 쓸데없는 사람 전화는 왜 기다렸어?"
 내 힐난에 그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어이없이 느껴졌다. 선배의 퇴사라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얼굴은 밝았다. 기다림의 포박에서 놓여난 것만으로 살겠다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감색슈트를 입게 된 날이었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어 하복을 입기에는 날이 추웠지만 남편은 그 옷을 고집했다. 옷장에 있는 동복은 버튼이 두 개 달린 구식 양복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것과 유행이 지난 것 중 어느 것이 나은 것인지 알 수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날이 선 소매 끝으로 채 아물지 않은 손등의 상처가 드러났다. 상처 때문에 나는 남편이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던 날을 떠올렸고 효심의 얼굴을 떠올렸다. 효심이 때문에 남편이 잠깐 원망스러워졌다. 그렇게 남편은 필기시험을 보러 떠났다.
 시험을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남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력이 나 있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집 전화로 6942를 눌렀다. 남편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 했다.
 "아직 시험 안 봤어."
 "왜?"
 "부장이 추천한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대. 그 사람 기다려서 봐야 한대."
 "그게 무슨 말이야?"
 시험 시각은 오전 10시였다. 두 과목을 치르면 12시가 되는 게 맞지만 회사 측에서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서류전형에 통과한 사람이 20명, 그날 시험을 치르러 온 사람이 15명, 그 외에 부장이 추천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교통사고를 당했다, 심하지는 않아서 간단한 처치만 받으면 될 것 같다, 기다려 달라, 는 요지의 얘기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불만을 품은 2명이 돌아가고 13명이 남아 그를 기다리는데 그가 오면 14명이 된다, 두 명을 뽑는 시험이니 이제 7대 1의 경쟁률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기다리기가 힘겹기는 나 역시 남편 못지않았다. 남편이 시험을 치렀는지, 기다리다 지쳐 시험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견딜 수 없이 궁금했다. 오후 4시가 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상하기 그지없는 번호 6942를 다시 눌렀다. 남편이 금세 전화를 받는 게 아무래도 불안했다.
 "아직도 안 봤어?"
 "응, 그 사람이 이제야 병원에서 출발했대. 하지만 금방 도착한대."
 "그냥 돌아와. 뭐 그런 회사가 다 있어? 그 사람을 꼭 채용하겠다는 뜻이잖아? 그럼 경쟁률이 13대 1이 되는 거야. 설사 그렇게 해서 어렵게 채용이 된다고 해도 그 따위로 일을 처리하는 회사에 무슨 충성을 바치겠다고 그래?"
 남편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다시 속삭였다.
 "그 사람 왔다. 얼른 끊어."
 참 절묘하기도. 안 오겠다고 버티면 내가 애를 들쳐 업고라도 달려가서 남편을 끌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시험을 치렀는지, 정말 그 사람이 오긴 왔는지 그 후에도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취직이 된다면 그 회사가 설령 여러 가지로 처사가 공평하지 못한 회사라 해도 남편은 안정을 찾을 것이고 허황된 생각도 접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기다림과 견딜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헤어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돼도 좋았다.
 남편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지쳐보였지만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그 사이 붉은 자국이 얼굴을 완전히 덮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시험은 잘 치렀어?".
 "2주 후, 게시판에 발표한대. 이제 면접만 보면 돼."
 말은 당연히 붙을 것처럼 했다. 정말 2주만 기다리면 다 끝나는 걸까?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 아니니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2주를 못 참을까? 4개월도 견뎠는데. 만약 떨어지면 다른 데 시험 보면 되고, 또 떨어지면 또 다른 데 시험 보면 된다. 기약 없는 전화만 아니라면 어떤 기다림이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나갔다. 결론적으로 남편은 취직이 되었다. 부장의 추천을 받았다는 사람은 어렵게 시험을 봐놓고 면접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부장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두면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안도하기는 했지만 내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온 시간이 어처구니없었던 데다 기껏 옮긴 곳이 그전보다 보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전 회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은, 부실한 재정 상태에 더 심각하게 경직된 구조였다. 하지만 남편은 불평하지 않고 잘 다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근처 피부과에서 치료도 받았다. 병명은 스트레스성 홍반이었다.
 핸드폰은 약정기간이 남아 있었다. 남편은 기간을 채워 쓰겠다고 했지만 집을 나설 때마다 잊지 않고 한 마디씩 했다.
 "이런 초콜릿 폰은 이제 시골 아줌마도 안 들어. 바야흐로 '쇼'의 시대라구. 화상 전화가 대세란 말야. 그리고 이따위 구식 양복 입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다시 더블 버튼의 시대가 도래 했어."
 회사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남편은 새 환경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지만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전에 없던 건망증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어느 날에는 휴대폰 대신 TV 리모컨을 들고 출장을 가버렸다. 남편의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화장대 위에 두면 화장대를 흔들었고 식탁 위에 두면 식탁을 흔들었다. 방바닥에 두니 집 전체가 흔들렸다. 꺼두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비밀번호를 조합해 보았다. 중요한 내용이 있을지도 몰랐다. 음성 사서함은 어렵지 않게 뚫렸다. 밤새 받지 못한 것까지 합쳐 음성 메시지가 스무 통이 넘었다.
 "느이 아버지 땅 찾았냐, 못 찾았냐. 무너진 담장은 관두고 생활비나 제때 보내라."
 어머니였다. 메시지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남편이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반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한 월급으로 어떻게 어머니 생활까지 챙겼을까. 어머니의 하소연이 끝나자 업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한 명 부탁합니다."
 남편이 휴대폰을 바꾸는 그날까지 전화를 걸어올 사람들이었다.
 "형님, 땅 파서 진행하란 말이요, 진행비 쪼매 부탁합니더."
 기가 막혔다. 남편은 여전히 땅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의 투정은 차라리 귀여웠다. 본격적인 빚 독촉은 그 후에 이어졌다.
 "카드회사입니다. 이자만이라도 부탁합니다. 저희 사정도 좀 봐 주세요."
 문제는 익숙한 카드회사의 독촉이 아니라 그 다음 내용이었다.
 "K캐피탈입니다. 이자가 넉 달째 연체되고 있으니 속히 납부 바랍니다."
 "N신용금고입니다. 이자가 연체되고 있으니 속히 납부 바랍니다."
 제3금융권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남편이 사채를 쓴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만 원짜리 한 장 마음 놓고 못 쓰는 사람이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른 걸까?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 막대한 이자를 무슨 수로 갚으려고. 도저히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따지기 위해 전화통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6942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에서 신호가 울렸다. 새 메시지 하나가 막 날아와 앉는 중이었다. 나는 '따끈따끈한' 마지막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음성은 낯이 익었다. 그는 우리를 넉 달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선배였다.
 "어떻게 지내고 있냐, 그깟 거 때려치우고 후딱 달려와라, 내가 좋은 데 잡아 놨다."
 나는 손에서 6942를 놓치고 말았다. 휴대폰이 뜨거웠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사이처럼 6942는 자기 안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상자 속에서 촉수를 단 벌레가, 다리 달린 벌레가, 날개를 단 벌레가 반복적으로 몸을 떨어댔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당선 소감 / 임 요 희
<그림2중앙>
선생님 시집을 읽고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박찬일 시인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진리는 간단하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신 서영채 선생님,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글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글쓰기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임철우 선생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내라는 '프로의식'을 심어 주신 임동확 선생님, 자신의 글과 사람됨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주신 최두석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수철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설을 앞에 두어야 삶도 따라온다는 말씀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보니 삶이 행복으로 가득 차는 느낌입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 대학원 문우들과, 글쓰기를 같이 해온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두 같이 열심히 했는데 하필 제가 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부채감을 느낍니다. 나은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 죄과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정의 시간, 어쩌면 많이 망설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보다 더 많이 제 소설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오래오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것입니다.

'전남일보사'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평생 저를 따라다닐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설가는 실존적으로 국적이 없다지요. 국적은 물론 호적, 어느 지역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공동체적 발상과 결별해야 하는 이 마당에 저를 품어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못생긴 글을 읽는 일에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969년 경기도 부천 출생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문예창작 대학원 재학




"자본주의 욕망, 핸드폰 소재에 잘 녹여내"
심사평 / 한창훈ㆍ이미란
<그림3중앙>

100여 편의 응모 작품 중에서 본선에 오른 작품은 '근원','오리엔트 시네마','할머니와 나','學生 필리핀 車公之柩', '실종', '진동' 등 여섯 편이었다.

'근원'은 우선 소설 문체에 대한 지극한 자세가 돋보인 작품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작가의 이미지 또한 풍성했는데 아쉽게도 그 미덕이 과잉 상태가 되어버려 독법을 방해하고 있었다.

'오리엔트 시네마'는 쉽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소설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에 눈이 갔으나 단편이 요구하는 '함축'을 놓치고 있는 게 걸렸다.

'할머니와 나'는 해학과 재치가 돋보였지만,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 없어서 이야기가 가볍게 흘러 버리는 게 흠이었다.

'學生 필리핀 車公之柩'는 죽은 자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성격화가 약하고,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가 분명하지 않아 주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실종'은 탄탄한 구성으로 습작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단지 소설을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작가 자신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요희의 '진동'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했다. 깔끔한 문장과 읽는 재미를 주는 입담으로, 후기 자본주의의 천박한 욕망과 현대인의 부박한 삶의 양태를 핸드폰이라는 소재 안에서 잘 녹여냈다는 점이 평가되었다.

소설 쓰기는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이 조망한 인간과 삶에 대한 가치를 확신하고 이를 다른 이와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때, 소설 쓰기는 시작이 되어야 하며, 독자가 소설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도록 긴장감을 잃지 않는 구성 방식이나 문체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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