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해체와 재구성… 성스러우면서도 ‘완전히 다른’ 무엇
440. 민화·성화, 허솔의 일러스트
2025년 03월 27일(목) 15:49
허솔 작가의 성화 일러스트 작품.
한복 입은 예수, 장삼을 두른 성모 마리아, 역설적으로 낯선 이 그림들이 출현한 것은 근자의 일이다. 장발의 성화를 비롯해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혹은 배운성이나 장우성의 성모화 등이 손에 꼽히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듣자 하니 무명작가 허솔의 성화 일러스트에 대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해외 파견 신부들의 요청이라 한다. 왜 이들이 허솔의 성화 일러스트에 관심을 가지고 주문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한복에 있다. 흑인 예수상이라던가 갓을 쓴 예수상 등 기독교의 토착화에 기댄 각 나라의 성찰이 부상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해외에 파견 나간 이들이 주로 묵상하는 것이 한국인의 정체 아니었을까 싶다. 한복 입은 성모 마리아나 돌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 등의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가. 허솔의 일러스트가 하나같이 한복차림에 기도하는 형태를 갖췄다는 점이 이 수요를 설명해 준다. 지난해 여름이던가 허솔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화가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취미로 시작하게 됐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취미로 민화를 그리던 이들이 전업 작가로 진입하는 경로를 닮았다. 카톨릭 집안이기 때문이겠지만 고향이 진도라는 점에서 혹시 소치 등 진도 허씨들의 DNA를 받은 것은 아닐까? 성모 마리아에게 한복을 입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국립남도국악원에 근무했던 아버지의 영향인 듯도 싶다. 이 그림은 성화일까 일러스트일까? 허솔은 자신의 그림에 성화(聖畵)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자신을 일러스터라고 말하는 까닭은 성화의 신성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아데가 말했던 히에로파니의 시선으로 보면 일정한 재현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성화의 범주로 다룰만한 그림이다. 이름도 빛도 없던 이들이 그렸던 민화가 기왕의 미술계를 압도하며 성장하는 시대적 경향을 인정한다면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가지는 격조의 층위랄까. 질적 수준이랄까. 숭고와 장엄의 단계를 거쳐 해체 혹은 재구성의 시대로 접어든 현대 미술사조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그 행간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허솔을 성화 그리는 민화 작가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마치 사찰의 산신각에 산신도를 그리듯이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일러스트 형식으로 그리는 민화 작가라는 뜻이다. 참고로 내가 정리한 민화의 개념은 모작(模作)-방작(倣作)-창작(創作)의 시기 혹은 시대를 거쳐 재구성돼 온 그림이다. 모작은 본(本)그림을 그대로 옮기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오차를 인정하거나 허용한다. 전국 시군 단위까지 퍼진 민화 학교에서 초보자들이 배우는 단계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베끼기 방식이라고 말해왔는데 그 전형적인 장르가 전통 판소리다. 스승의 판제를 모사하되 가능하면 그대로 베껴 노래하는 것을 오리지날로 인정하는 분야다. 방작은 본그림이 아니라 원화를 자신의 느낌이나 감성으로 재해석한 그림이다. 준창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작은 레시피(recipe)를 염두에 두지 않은 그림을 말한다. 우후죽순 범람하는 민화들이 대개 모작에서 방작의 단계로 나아왔지만, 창작의 단계로 진입한 작품들은 아직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허솔의 성화·민화가 가진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허솔 작가의 성화 일러스트 작품.
성화와 민화의 행간, 신성의 발현과 엘리아데의 히에로파니

기독교의 내용을 그린 종교화를 성화(聖畵)라고 한다. 불교의 내용을 그린 그림을 불화(佛畵)라고 하고 더러는 탱화(幁畵)라고 한다. 무속화를 포함해 이들을 종합한 것이 종교 그림이다. 국어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종교화는 예배나 포교, 찬미 등의 종교 활동을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런 점에서 허솔의 그림은 종교화의 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인물이 어떻게 성화(聖畵)로 인식되거나 인정되는가? 단순히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성화적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상징물들이 각각의 그림 속에 배치돼야 한다. 예컨대 묵주(默珠)가 가진 상징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관념한다. 묵주는 카톨릭에서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영적 장미 꽃다발을 뜻하는 것으로 로사리오(Rosarium)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불교의 염주(念珠)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신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한다. 또 백합을 함께 그리면 이 꽃이 마리아의 순결함과 동정성을 상징하게 된다. 가장 뚜렷한 꼴이 한복 저고리 치마에 도드라지는 십자가 묵주다. 지면상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왕관과 족두리, 옷고름의 색깔, 동굴을 상징하는 황색 배경 등 기독교의 상징들을 암호처럼 배치한다. 여기에 작가의 종교적인 체험과 영성 등이 스며들어 한낱 일러스트에 불과했던 그림이 신성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네 민화(民畵)가 세화(歲畵)로서의 기능을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정초에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했던 세화나 봄철 절기에 맞춰 대문에 붙였던 여러 그림과 문자들이 특정된 시기와 장소에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이치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성당이나 집안의 기도처에 걸어두면 성모의 발현(發現)이 일어날까? 엘리아데는 ‘신화, 꿈, 신비’(도서출판숲, 2002)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스러운 돌, 성스러운 나무는 돌 그 자체로서 그리고 나무 그 자체로서 숭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히에로파니이기 때문에, 더 이상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성스러우면서도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숭배되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창안한 용어 히에로파니(hierophanie, 聖現)는 문자 그대로 성인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성스러운 일 혹은 성스러운 인격이 새롭게 재현된 것을 말한다.

허솔 작가의 성화 일러스트 작품.
남도인문학팁

한국적 성화의 계보와 허솔의 성화·민화의 위치

한국적 성화, 예컨대 한복을 입었다던가, 한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든가 하는 등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우리나라 성화를 그린 사람으로 이희영(1756~1801)이 거론되긴 하지만 관련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없다. 1920년에 그린 우석 장발(張勃, 1901~2001)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성화의 초기 작품으로 거론된다. 이외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운보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의 ‘예수의 생애’는 1951년부터 3년간 한국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린 작품으로 성화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소 외양간의 예수 탄생, 갓을 쓴 예수 등 인구에 널리 회자한 작품이다. 배운성(裵雲成, 1900~1978)은 월북화가다. 한국 근대 성모 성화 등을 남겼다. 강신무 무당 이미지로 자화상을 그렸던 내력에서 성모 그림에 이르는 종교적 편력이 내 관심사다. 장우성은 1950년 국제성미술전 참가를 계기로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라는 작품을 통해서 서양의 기독교 이미지를 한국적인 모습으로 재해석한 이다. 현재 가장 왕성하게 성화를 그리는 이는 심순화이다. 1993년 현몽을 통해 성화를 그리기 시작해 많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봉정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등 내가 주목하는 작품들이 많다. 이상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다만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무명작가 허솔의 일러스트가 우리나라 성화·민화로서의 계보 속에서, 특히 이름도 빛도 없는 이들이 부상된 민화의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바야흐로 민화 전성의 시대이다. 무명작가들의 부상을 나는 시대정신의 시선으로 주목하는 중이다. 허솔의 성화·민화가 바티칸 성당으로 초청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까? 허솔의 일러스트가 해외 파견 신부들에 의해 요청되는 까닭을 한국적 신성의 발현과 히에로파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