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광장·박안수>정조대왕의 '탕탕평평실'
박안수 경제학박사·칼럼니스트
2025년 03월 11일(화) 18:28 |
![]() 박안수 경제학박사·칼럼니스트 |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 시·도교육감 선거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핸드폰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자도 쇄도했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27분 임금 중 치적과 은덕이 높은 세종, 영조, 정조 임금을 대왕(大王) 칭호를 넣어 부르고 있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공중파 방송에서는 ‘이산(李算)’, ‘옷소매 붉은 끝동’, ‘한중록’ 등 정조임금을 주제와 소재로 한 여러 사극(史劇)을 아직까지도 재방송되고 있다.
이는 그만치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 할 일들이 많다는 생각이다.
정조대왕의 혁신도시 화성(수원)건설, 만석거·서호(西湖) 인공저수지 축조, 금난전권을 혁파한 신해통공, 식목정책, 대전통편, 천재지변 대응, 거중기 발명, 한강배다리 등 백성을 위한 숱한 하드웨어 정책은 논외로 붙인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이라고 하는 실학이 가장 융성하여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왕실 도서관을 지어 공부하는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비록 서·얼(庶孼)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관직에 등용했던 파격적인 인사관리를 벤치마킹했으면 좋겠다.
최근 어느 전직 대통령은 정치 지도자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하고, 모(某)작가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분께 공부를 주문하였다.
광주시는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문학도시 명성에 걸맞게 책 읽는 도시로의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흔히들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이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선의 역사상 당쟁(黨爭)이 최고조로 심할 때가 아마도 영·정조 시대라고 역사시간에 배웠다.
영조시대에 소론, 노론, 남인, 북인 4색 당파에 이어 정조 때에는 벽파와 시파까지 분열되어 당쟁이 더욱 심했지만, 탕평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오죽하면 왕의 침실을 ‘탕탕평평실’ 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고 하니 많은 고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책에 반대한 관료에게도 비밀 편지를 보내는 등 소통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을 펼치는 지혜를 만들어 냈다.
다소 사상이 다른 채제공. 조심태 등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정책조율을 통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영조까지는 잦은 난이 발생했던 서북과 동북출신 그리고 무신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영남출신은 문과과거를 응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별을 두었다.
하지만 정조는 안동시 도산서원에서 특별과거인 별과(別科)를 시행하는 등 지역차별 없이 인재를 선발하였다.
지금도 유럽연합 독일이 성장발전하고 있음은 아마도 앙겔라 메르켈총리의 16년간 연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정치사도 여소야대가 많았는데 지금이라도 독일의 연정과 정조의 탕평책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
원로배우가 TV방송 대담에서 예전에는 존경하는 정치인이 많았지만 요즘 정치 지도자에게서 존경의 단어와는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고 하였다. 새겨 들을 말로 공감가는 대목이다.
또한 며칠 전 어느 석학(碩學)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시대 많은 리더에게 양심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120년 전(前) 을사년과 같이 원인은 다르지만 오직 옭고 그름만이 존재하는 다소 을싸년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창시절 입법· 사법· 행정 3권 분립이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배웠는데 일부는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마저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 보인다.
정조임금은 중요한 정책결정시 술 반잔도 마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성록’과 ‘홍재전서’를 통하여 깊은 자기성찰이 있었다고 하니 힘들고 어려운 의사결정시 참고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있을 모든 재판에서 법률과 양심에 따라 훌륭한 판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