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故김사복씨 유족 “21세기에 계엄이라니”
40주기 맞아 광주서 추모행사
민주묘지·힌츠페터 정원 참배
광주 참상 목격 부친 건강 악화
"계엄, 권력 유지 무도한 판단"
2024년 12월 19일(목) 18:44
19일 오전 광주 서구 풍암운리성당에서 김사복추모사업회가 주관한 ‘김사복 바오로 선종 40주기 추모 미사’가 진행됐다. 윤준명 기자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구묘역 위르겐 힌츠페터 기념정원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인물 김사복씨의 유족들과 김사복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윤준명 기자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인물이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기자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를 누볐던 고(故)김사복씨의 유족들이 그의 40주기를 맞아 광주를 찾았다. 유족들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면서 이번 12·3계엄사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했다.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는 지난 2017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인물 김사복 씨의 40주기를 맞아 장남 김승필(65)씨 일가족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후손 관련단체가 추모행사를 진행했다.

김사복씨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5월 20일부터 21일, 그리고 23일부터 24일까지 두차례 독일 공영방송 ARD 특파원인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워 광주를 누비며 당시의 참상을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씨의 도움으로 힌츠페터가 촬영한 5·18 광주의 참혹한 현실은 이후 ‘광주 비디오’로 제작돼 전국에 퍼졌고, 이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광주의 참혹한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김사복씨는 깊은 후유증에 시달렸고, 결국 1984년 12월1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역사의문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인물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가 추모글귀를 남기고 있다. 윤준명 기자
그동안 김승필씨 혼자서 광주를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아내와 아들이 함께 광주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김씨는 참배에 앞서 역사의문에 서서 ‘광주의 억울함을 전한 부친의 소신을 잘 전하는 아들이 되겠다’는 글귀를 남겼다.

추모탑 앞에 헌화를 마친 김씨 가족과 유공자 후손들은 문재학·윤상원 열사의 묘비를 참배한 뒤 구묘역에 있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념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힌츠페터의 머리카락과 손톱 등 유품이 묻혀있는 묘역을 한참 들여다보던 김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친의 행적들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아버지께서 처음 광주를 다녀오시던 날 ‘어떻게 군인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할 수가 있냐’며 화를 내셨다”며 “광주의 참상을 두눈으로 지켜본 아버지는 이전보다 술을 자주 드시기도 하고, 어머니와 다툼이 늘어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후로도 많이 힘들어하시다가 급격히 몸이 쇠약해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회상했다.

김씨를 비롯한 유공자 후손들은 이번 12·3계엄사태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이번 계엄사태를 보며 21세기에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싶어 큰 충격을 받고,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매주 국회의사당으로 나갔다. 비상계엄 선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통령의 무도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곳의 오월영령들의 희생과 역사의 엄중함이 권력에 저항할 힘이 됐다. 오월정신을 바탕으로 한 국민들의 민주의식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구한 결과”라며 “계엄사태 이후 진실과 정의를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광주로 향했던 아버지의 소신을 전하는 일이 곧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날 추모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를 찾은 ‘민주경찰’ 고(故)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 안호재씨도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경찰 수뇌부가 내란의 주요 임무를 수행했던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며 “아버지를 포함한 44년전 전남경찰들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고, 많은 곤욕을 치렀다. 선배 경찰들의 정신을 망각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앞서 같은 날 오전 광주 서구 풍암운리성당에서는 김사복추모사업회가 주관한 ‘김사복 바오로 선종 40주기 추모 미사’가 진행됐다.

김선웅 풍암운리성당 신부가 집전한 미사에는 유가족과 천주교 신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미사는 김 신부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생전 김씨의 모습과 행적이 담긴 추모 영상이 상영됐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