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 살아가는 힘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2024년 11월 26일(화) 17:30
임효경 완도중 前교장.
가을이 겨울에게 길을 내어주는 입동(立冬) 아침, 계절의 흐름은 여지없다. 차가운 기운에 열어두었던 거실 통유리 문을 닫고 보일러를 가동시키고 실내 온도를 높인다. 집안은 적막하다. 집 앞 시냇물소리, 거실 앞 숲 속에서 울어대던 새소리와 바람소리도 꼭 닫혀버린 문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남편도 일하러 나가 고맙게도 이 공간에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해 준다. 며칠 전 어느 시골 까페의 뜰에서 고이 모셔 온 모과 다섯 알이 풍기는 노오란 향내가 집안에 가득하다. 귀도 호강을 한다. 우리 집 인공 지능 아가씨 ‘아리’가 틀어 준 FM음악방송에서 바이올린, 첼로가 어우러진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피아니스트 겸 클래식 음악방송 진행자의 친절을 맘껏 누린다. 무심한 듯, 그래서 진정성이 더 느껴지는 목소리로 아픔과 슬픔 가득한 사연을 차분하게 읽어 준다. 정년(停年)이의 삶을 사는 나의 마음도 가끔 어인 일인지 쓸쓸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공감이다. 음악은 그 광대한 공감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부드러움에 신기한 힘이 있다. 가을의 끄트머리와 겨울의 시작점, 나도 정년 후 헛헛함을 음악으로 위로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장착해 본다.

창밖을 보니, 무등산 자락의 나무들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눈이 번쩍 뜨일 만큼의 장관은 아니다. 이번 주말에 서울 시숙님과 형님이 백양사와 내장사의 단풍 구경을 하러 왔다가, 수많은 차량과 인파로 고생하는 낭패를 보셨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초록인 남도의 숲만 보고 돌아가야 하나며 볼멘소리를 하셨다. 예년 같으면, 진즉 빨갛게 노랗게 산을 물들여 놓고 사람들을 감탄시킬 준비를 다 해 놓았을 시절이긴 하다. 미리 예약하고 여행을 준비하고 먼 길 차타고 왔더니, 단풍은 간 데 없고 수많은 여행객 긴 줄로 힘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도의 인심이 작동하였다. 심심한 위로를 드리고자 광주 동서는 하루 짬을 냈다. 두 분을 순천만 갈대 습지와 순천정원으로 안내하였다. 서울에 터 잡은 지 오래이다 보니, 순천까지 가 보는 엄두를 내 보지 못하다가, 첫 여행을 하시고 그만 마음이 풀어지셨다. 늦가을 오후의 정취가 물든 갈대숲 사이 데크길을 걷고 새들의 비행을 한없이 쫓다가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고 한다. 또 다른 동서인 나 또한 해가 뉘엿뉘엿 지는 담양의 관방천을 함께 거닐며, 위로의 상품을 전해드렸다. 화보를 방불케 하는 멋진 사진으로. 또 내 고향 사랑 기부금 상품으로 농업 기술 센터에서 분양 받은 ‘담양 고향사랑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 쌈배추, 여린 무잎과 가지 등 야채 한보따리를 안겨 드렸다. 마트에서 산 야채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싱싱하고 아삭아삭한 맛이 일품이라고 동서가 옆에서 자랑을 대신 해 준다. 형님 입이 함박만 해 지셨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찍은 사진을 보고 서울 친구들이 난리야~. 이렇게 동서들이 함께 놀아주는 것이 신기하다고” 서울 토박이 새침데기 처녀로 투박한 전라도 남자랑 살아 온 형님은 시집 참 잘 왔다.

부모의 품을 일찍 떠나 서울에서 자리 잡느라 고생이 많았던 시숙님은 그 인생 여정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시고, 우리는 그 이야기 듣기를 즐기는 사이이다. 하늘나라 가신 아버님이 늘 엄하셨는데, 당신도 닮은 것 같다고. 아들이랑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고맙다”하시며 꼬옥 안아두시던 그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다고. 또 부모님 모시고 3남 3녀가 그 휘하 딸린 모든 식솔과 함께 일본 후쿠오카 팔순 기념 여행 했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고, 그것이 그렇게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고.

금세 어둠이 내려앉은 가을 저녁, 우리 네 사람은 하루를 마감하며 또 다시 힘을 낼 미각 여행의 장소를 물색했다. 우리가 선택한 식당은 삼대(三代)에 걸치는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다. 헐값에도 팔리지 않던 담양 외곽의 꽤 넓은 포도밭을 큰 아들 내외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 IMF시절, 어린 아들 둘은 어리고 그들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 그들 어머니는 그 포도밭 터를 닦고 집을 세우고 요리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가며 조촐하게 식당을 개업하였다. 음식은 깔끔하고 간이 딱 맞았다. 다루기도 무겁고 깨지기 쉬워 보통 식당에서 꺼리는 도자기 그릇에 담아내는 퓨전 한정식은 정성이 가득 들어있었다. 여름에는 텃밭에서 갓 따온 야채를 제공하였다. 늦가을이면 후원에서 딴 홍시가 후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여주인은 주방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다가 나와 인사를 한다.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모르겠다며.

지금은 그 아들 둘이 어느새 자라 어른이 되고 장가를 가서 어머니 대신 그 자리를 지킨다. 며느리들까지 그 터에 뿌리를 내리고 가족 기업 경영을 한다. 이 집안이 살아가는 힘을 얻었고 앞으로도 힘을 얻어 갈 그 터에서 떡갈비 정식을 대접받은 시숙님이 한마디 하신다. “역시 고향의 맛은 변함없이 위로가 되네요. 서울에서 누리지 못하는 여유와 정을 이렇게 받으니, 힘이 나네요. 우리 제수씨들, 고맙습니다.”

대도시의 바쁜 일상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여행을 떠나와 남도 고향의 품 안에서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격하고 삶의 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여, 그곳에서 또 오롯이 누리며 만들어 갈 인생 여정 이야기 또 기대하며 기다리겠다. 우리는 더 넓은 품을 만들고, 그 기막힌 이야기 들어드릴 준비를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