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하인즈 워드와 국수주의
김강 호남대 교수
2024년 11월 05일(화) 17:30 |
광활한 서부를 일군 우직한 힘과 용맹스러운 돌파력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땅 따먹기’ 경기처럼 보이는 풋볼은 미국사의 원동력인 ‘개척자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스포츠이기에 그에 대한 응원도 여느 경기와 달리 특별하다.
미국 유일의 전국일간지 USA TODAY의 스포츠 뉴스에는 시즌인 9월부터 11월, 그리고 이어 최종결승전인 ‘슈퍼볼(Super Bowl)’이 열리는 이듬해 1월 말까지 매일같이 풋볼에 대한 최신소식이 실리며, 평일 오후나 휴일에 동네 공원에서 풋볼 공을 던지고 내달리는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프로야구팀 유니폼과 함께 풋볼팀 유니폼은 미국사람들이 흔히 입고 다니는 레저 의류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게다가 그 각별한 인기만큼 전미프로풋볼리그(NFL) 슈퍼볼에서 최우수선수상(MVP)을 누가 받았느냐에 대한 관심이 우승팀에 대한 충성으로 뜨겁고 치열하다.
2006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계’ 혼혈인 하인즈 워드가 MVP를 차지한 것이다. 그가 절반은 한국의 피를 지녔다니 놀랍고도 축하할 일이었다.
아시아에 한류열풍이 거세게 불고 시작한 마당에 보태어 세상의 우수한 여러 인종이 모여 산다는 미국에서 한국 혈통의 선수가 미국 대중스포츠 우상으로 떠올랐기에 국내 언론의 관심과 호들갑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하지만 워드가 ‘혼혈 한국계’가 아니고 온전한 미국인이었다면, 사실 미국의 시각으로는 워드는 분명 ‘미국인’이다. 여기서 관심이 그토록 요란했을까?
워드가 백인이 아닌 ‘흑인’ 혼혈이기에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변방인 기지촌에 한때 거주했던 홀어머니가 이국만리 낯선 땅에서 고생하며 키웠던 자식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워드 본인은 물론 그의 어머니도 회피할 정도로 광적이었다.
이후 워드 모자는 장원급제 금의환향 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아니 우격다짐 몰고 온 듯하다. 그들의 모국 방문이 한국의 ‘선정적’ 시선에서 벗어나 가슴 아픈 고향과 추억을 더듬어볼 수 있는 ‘소박한 귀향’이 되었는지는 그들만이 알뿐이다.
워드 열풍과 관련하여 나와 남을 가르는 우리의 정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연일 노래와 음식 등 감각적 K-Culture가 글로벌 대세라는 ‘셀프 국뽕’ 기사가 만연하는 이 시기다.
먼저 이 시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은 과연 ‘어떤 조건을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에게 찬사가 몰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워드의 경우는 정도가 지나친 듯하다. 그가 슈퍼볼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을 받기 전만 해도 우리는 그의 존재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미 언론에서 풋볼선수로서 워드의 활약상에 대해 이미 수 차례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그와 그를 키운 어머니의 인생 역경에 아무런 관심도 동정도 이해도 없었다. 워드가 ‘미국’ NFL 영웅으로 다시 탄생한 바로 직후 그는 ‘번개’처럼 한국의 별이 되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뉴욕한국문화원 관계자는 한국계인 워드가 맹활약한 것은 국가 브랜드홍보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그가 비록 ‘미국인’이지만 정부 차원에서 예우할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부는 워드에 대한 체육훈장 포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명예 시민증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답게 자발스러웠다.
이 같은 우리의 ‘오버’에 대해 진중권 교수는 혼혈인을 차별하던 ‘인종주의적 옹졸함’이 미국 시민까지 한국인으로 예우를 해주자는 ‘국제주의의 통 큰마음’으로 돌변한 것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독특한 한국식 인생철학의 표현”이라고 일갈했다. 통렬한 일침이다.
워드가 미국에서 자랐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굴복하여 마약이나 폭력 같은 범죄에 빠졌다면 그 누구도 흑인 혼혈아에 불과한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성공신화만 추구할 뿐이며 정작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은 대체로 외면하며 살아왔음을 워드의 성공 신화에서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 워드가 혼혈임에도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워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오늘날처럼 그가 미국 전체에 알려지고 피츠버그시 전체를 환영의 도가니로 몰 수 있는 미국 최고의 풋볼영웅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지 자문해본다.
피부색은 물론 외양과 생각에 최소한 차이가 나도 왕따로 소외시키는 우리의 비정한 현실을 마냥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수치스러운 짓이다. 우리보다 피부가 검어서 검둥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라고 손가락질하는 그 못난 인종차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며, 이런 풍토에서 워드가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워드의 성공은 이민자일지라도 노력하는 이들을 키우고 포용하는 ‘관용적 사회’가 그곳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정착의 경도에서 구시대에 기인한 갖가지 사회 병폐적 불평등의 질병을 앓고 있다. 근원이 제도적 모순이라면 정책 수정으로 해결이 되겠지만, 남이 나와 ‘컬러’가 다르다거나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해서 생기는 ‘차별의 괴리’는 주체에 상관하는 객체의 본성을 공정히 바라보려는 정신을 되찾지 않는 한 치료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례로 셰익스피어도 이미 400여 년 전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리고 그 자신도 동시대인으로서 그 같은 비인간적 상황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오셀로’와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작품에서 이미 역설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다문화인, 혼혈아, 입양자,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살기에 우리의 토양은 여전히 부실하고 척박하다. 상대를 권력이나 소유의 정도로 평가하지 않는 휴머니즘의 세상을 만들어가자. 나도 혹시 ‘사회적 근친자’와의 유리한 관계 속에 평생을 안주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또다시 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