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최용수>베스(bess) 선교사의 삶과 헌신을 기리며
최용수 전 광주기독병원 원장
2024년 09월 10일(화) 18:12
최용수 전 광주기독병원 원장
2024년 9월 3일, 광주기독병원은 한 여성의 삶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추모 예배의 자리를 가졌다. 그녀는 바로 1961년부터 1985년까지 광주기독병원에서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사역한, 한국명 이경자, 베스 발레리아 브라더스 디트릭(Bessie Valeria Brothers Dietrick) 선교사이다. 필자는 2005년 광주기독병원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셨던 베스 선교사를 뵌 이후 병원 보직자로서 메일과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남편인 디트릭 선교사께서 별세하신 후 양림동산 선교사 묘역에 안장하기 위해 유해를 모시고 온 베스 선교사를 다시 뵈었는데, 단아함과 강인함, 자애로움을 갖춘 그녀의 삶은 의료선교사인 남편의 단순한 동반자나 조력자의 역할을 넘어,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헌신적인 동역자의 모습이었다.

베스 선교사는 192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출생하여 1949년 7월 펜실베니아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인 디트릭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1953년 남편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서 버지니아 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쳤으며,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맥과이어 보훈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남편은 1957년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쳐갈 무렵에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 한국선교사로 신청하여 1958년 3월에 선교사로 지명 받았다 당시에 큰 딸 페이스는 8살, 큰 아들 존은 6살이었다.

2024년 의료대란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에서, 남편이 외과전문의 취득을 앞두고 아프리카 불모지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한다면 두 자녀를 데리고 있는 어머니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1958년 11월 9일 편지에서 그녀는 “요즘 화물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 굉장히 신나고 럭셔리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뱃짐을 싣기 위해 아홉 번이나 다른 항구에 기항해야하는 여행을 30일 동안 하고나니 럭셔리하다는 것이 진절머리가 나는 중에 한국 해안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라고 표현하였다. 가족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베스 선교사는 그 순간을 기쁨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한국이 가진 많은 도전과 어려움도 느꼈을 것이다.

필자는 베스 선교사가 한 가정의 아내이고 어머니인 동시에 디트릭 선교사의 동역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베스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의 외과 과장, 병원장, 의료부장으로 사역한 디트릭 선교사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 자신은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인 선교사역을 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오전에는 선교사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의 교사로 사역하였으며 오후에는 광주기독병원으로 출근해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와 화이트크로스 재단에서 보내온 각종 후원물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선교회 관련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베스 선교사는 대학에서 현대 무용과 체육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문화적 측면에서 광주의 젊은이들에게 미국 문화를 전달해주는 매체였다. 특히 베스 여사가 매주 월요일에 실시하는 대학생을 위한 영어성경공부 시간에 광주의 많은 젊은 대학생들이 영어를 통한 성경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매 학기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저녁만찬에 초대하여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저녁식사를 Full-course로 제공함으로써 60년대와 70년대에 아직 미국식 식사 전례를 몰랐던 광주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아직까지 서양의 고전음악과 교회음악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청년들에게 고급 오디오를 통한 음악 감상도 또한 좋은 공부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속담에 머리가 좋고 일만하면 미련한 곰을 만든다(bright head and work only make John a dull boy)는 의미를 알게 해준 좋은 스승이었다.

1964년 그녀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미국에서의 우리 안식년 휴가가 끝났다는 사실은 며칠 전에 우리가 안식년 휴가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을 위한 광주제일교회 환영예배에 참석했을 때 있었던 한 사건으로 인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환영 예배는 아주 흐뭇했습니다. 두 어린 소녀가 이중창 특송을 부르는 동안에 베스는 커다란 갈색 쥐 한 마리가 앉아있는 장의자 밑에서 달려 나와 예배당 바닥을 가로질러서 강대상 밑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베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특히 설치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알고 있듯이 그녀는 남은 예배시간 동안에 얌전히 앉아 있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요점은 예배당 안에 쥐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복음이 선포되고, 아직도 선교사들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병원 업무, 가르치는 일, 화이트크로스 물품 정리하는 일, 그리고 자신들을 찾아오는 여러 다양한 유형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바쁜 생활이기는 하지만 재미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삶은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디트릭 선교사의 동역자로서 광주기독병원이 의사 수련병원, 종합병원으로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녀는 1985년 미국에 홀로 계신 시아버지의 위독 소식을 듣고 양림동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항상 광주에 있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광주를 방문하였고, 1993년에는 그녀의 헌신이 인정되어 광주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2024년 8월 22일, 섬김의 소명을 다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베스 선교사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베스 선교사의 삶은 단순한 선교사의 역할을 넘어, 지역 사회와 깊이 연결된 헌신의 역사였고, 그녀의 섬김과 사랑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베스 선교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가 광주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