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레이디 오스칼
도선인 취재2부 기자
2024년 09월 08일(일) 17:38
도선인 취재2부 기자.
지난 7월부터 서울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는 문화에 국경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8세기 절대왕정 시대 프랑스 구중궁궐의 이야기를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리 앙투아네트-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이라는 소설로 엮었다.
 
이를 다시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가 1972년 실제 역사에 창작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전설적인 작품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탄생한다. MZ세대에게는 생소할 수 있으나 80년대 초중반생에게까지는 화려한 궁정문화와 프랑스 혁명을 알린 기수 역할을 했다. 2012년 영화 레미제라블 이전까지 명실상부하게 프랑스혁명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연극과 영화, 뮤지컬로 재해석된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이번에는 한국에 의해 창작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로 초연을 했다. 프랑스의 문화가 오스트리아와 일본을 거쳐 한국의 손에 재창조되기까지 10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변치 않았다. 격동의 프랑스 혁명의 시대, 여성으로서 주어진 삶이 아닌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간 여성의 이야기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원작은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인공이지만, 베르사유의 장미 주인공 오스칼은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남성’이다. 군인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사회화된 남성’인 오스칼이지만, 남성에 비길 데 없는 실력으로 한 치의 허점도 허용치 않는다.
 
‘레이디 오스칼’은 남자 이름인 오스칼에 숙녀를 뜻하는 ‘레이디’가 붙은 어색한 단어다. 오스칼의 어원은 ‘신의 창’이라고 하니 우리말로 치환하자면 ‘신창수 양’이라고 느껴질 법 하다.
 
남성의 이름을 한 여성 오스칼은 남성들의 세계인 군대에서 남성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신뢰받는 근위대장이었고 아버지에게는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명예는 자신을 감싼 비단옷에 불과했음을 오스칼은 스스로 깨닫고 내려놓는다.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영광을 위해 희생된 민초들의 삶을 목격한 오스칼은 자신도 하나의 금빛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시대의 한계임이 분명하고 그의 잘못도 아닐 테지만 오스칼은 금빛 자수가 새겨진 근위 제복을 벗고 허름한 위병, 지금으로 따지면 경찰복을 입는다.
 
화려한 사치를 전부 내려놓으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가진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시종이자 친구였던 앙드레. 그가 친구가 아닌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애석하게도 앙드레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스칼은 깨닫는다.
 
친구이자 연인의 죽음을 뒤로 하고 오스칼은 민중들의 곁에, 가장 앞에 선다. 빵을 달라며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봉기한 민중들의 행렬 앞에서 오스칼은 몸을 사리지 않았고 결국 흉탄에 목숨을 잃는다.
 
남성에 못지 않은 실력에 더해 세상의 부조리함과 파멸을 외면 않고 가장 먼저 나서는 여전사의 이미지가 이렇게 완성됐지만, 오스칼도 그저 한 명의 여성이었다.
 
스스로도 시대의 희생자였지만 그를 외면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실천한 오스칼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표상이라고도 불린다.
 
주어진 삶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는 어쩌면 시대와 국가, 성별을 초월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 한국의 뮤지컬이 된 일본 만화의 프랑스 여성이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