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학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휘본부였다"
2024년 09월 08일(일) 16:13
흥학관기억시민모임과 광주시 동구청이 지난 5일 광주시의회 회의실에서 시민단체, 지자체, 역사단체 회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 사적 흥학관 기억공간 조성 토론회’를 개최했다. 흥학관기억시민모임 제공.
일제 강점기 광주 청년들의 소양 공간인 ‘흥학관’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휘 본부이자 전국 확산의 거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흥학관은 특히 동학농민군의 집강소부터 5·18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지는 대동문화의 맥을 전승하고 일제강점기 광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인 만큼 조속히 기억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흥학관기억시민모임과 광주 동구는 5일 광주시의회 회의실에서 시민단체, 지자체, 역사단체 회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 사적 흥학관 기억공간 조성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에서 노성태 시민모임 대표는 ‘흥학관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1929년 11월3일 광주고보생과 일본 학생들이 동문다리 등지에서 대치하던 급박한 상황에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 장석천·나승규·국채진 등이 흥학관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투쟁 방향의 대전환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어 노 대표는 “흥학관의 긴급 지침은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였던 장재성에게 전달됐고, 독서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오후부터 거리시위로 전환됐다”며 “오전의 학생들 간 패싸움이 일제를 타깃으로 한 저항의 거리시위로 바뀌면서 거대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흥학관은 또 광주 최초의 동맹휴업투쟁(맹휴)이 벌어졌던 1924년 6월, 이른바 야구 시합으로 발발한 맹휴 때에도 학부모들의 긴급회의와 전남학부형대회가 열려 학생들의 맹휴투쟁 지원 공간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 대표는 “1926년 11월 광주지역 최초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인 성진회 결성도 ‘흥학관 출입 학생 중에서만 회원을 선발하라’는 문건도 있었다”며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이가 흥학관에서 기숙하며 흥학관 내에 설치된 청년학원 고등과 출신의 ‘왕재일’이라고 확인했다.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흥학관과 1920-30년대 청년운동’ 주제발표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흥학관에 터를 잡은 광주청년동맹이나 광주소년동맹 및 흥학관에서 활동했던 전남청년연맹 소속 간부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흥학관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 확산 본부였다”고 강조했다.

명진 광주시의회 교문위원장은 토론회 축사를 통해 “흥학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광주청년운동의 산실로써 역사적 상징성이 매우 큰 만큼 지역사회가 함께 기억공간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현기 기자 hyunki.min@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