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톱>해남에서 재조명 된 덕촌 양득중의 실학사상
양성현 작가 30일 해남 인문학 강좌
“해남 조선 실학의 시작이면서 중심”
“덕촌 사상 좇는 역사마을 가치 가져”
2024년 09월 01일(일) 15:43
지난 30일 해남에서 열린 덕촌 양득중(1665~1742)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인문학 강좌에서 양성현 작가가 실학의 중심지 해남과 실사구시 재발견을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해남=전연수 기자
임진왜란과 의병, 실학의 역사를 천착해 온 양성현 작가가 지난 30일 해남에서 덕촌 양득중(1665~1742)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옥천만대(대표 양창열) 주관으로 전남도와 해남군의 후원으로 진행된 이날 강좌에서 양 작가는 ‘실사구시 역사마을 만들기-실학의 중심지 해남과 실사구시 재발견’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좌에는 이종일 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장과 박옥임 순천대 명예교수, 이원형 전 호남대 교수(전 호남진흥원 이사), 송어지니 전 전남테크노파크원장, 이영규 세무사, 양지훈 박사, 차 전문가 이승아 선생, 김옥기 박사, 최희순 선생, 차미정 문화 활동가, 황은희 해남 마을활동가 등이 참석해 양득중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따라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영조 재위 5년인 1729년이다. 당시 종부시정으로 있던 양득중이 영조에게 ‘실사구시가 진정한 격언’이라고 건의했고, 영조는 이를 크게 찬동하며 이 네 글자를 자신의 거처에 걸어두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영조실록, 영조5년(1729년) 2월 6일 기사) 당시 양득중은 ‘세상을 다스리고 성리학을 지키는 것’이라는 기존 주장을 ‘비판’하며, 이것이 허위와 가식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실사구시’, 즉 ‘사실에 따라 진리를 탐구한다’는 개념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성리학의 학문적 이론보다는 나라를 실제로 잘 다스리는 개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퇴계 이황 이후 성리학 외의 모든 학문이 배척되고, 오직 성리학만으로 국가를 운영하자는 주장에 맞서 성리학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성리학의 교본인 ‘주자어류’를 폐기하고, 실질적 개혁을 담고 있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경연의 교재로 채택하자는 주장도 했다. (영조실록, 영조 17년(1741년) 2월 23일 기사) 실학을 본격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논의하자는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덕촌의 이러한 주장은 조선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실학이 정치의 중심 주제로 부상하면서 다수의 실학자들이 등장했고, 조선의 정치와 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정약용, 성호 이익, 유수원, 박지원 등 수많은 실학자들이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학문적, 정치적 활동은 영조와 정조 시대를 다른 왕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실학의 시대, 개혁의 시대로 만들었다.

양 작가는 “호남을 중심으로 실학의 연원을 탐구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학문적,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며 “실학이 단순히 과거의 학문적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실천적 지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해남이 단순한 역사적 장소를 넘어 조선실학의 시작이면서 중심이었고 실사구시 역사마을로서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도 양 작가의 설명이다.

해남에서 태어난 양 작가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내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역사와 인물 이야기를 쓰면서 임진왜란과 실학, 의병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 ‘유성룡 기축옥사’를 비롯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 ‘한양도성 가는 길’, ‘보성 義 이야기’ 등을 펴냈다.
글·사진=해남 전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