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庭園·임효경>고맙습니다
임효경 완도중 교장
2024년 08월 20일(화) 18:10
임효경 완도중 교장.
뜨거운 여름 태양은 광복절 지나면 좀 수그러진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30도를 휠씬 넘지만 조석으로는 제법 선선해 진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올림픽의 뜨거운 열기도 사그라들고,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일들이 왔다가 가고, 다시 또 일상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유난히 이번 여름에는 많은 부모님들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슬픔도 한계치가 있어서, 죽음도 자연의 섭리 일부분이지 싶어서, 덜 슬퍼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요즘입니다. 자연의 흐름과 인생의 흐름을 내가 어떻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부질없는 몸부림이지요.

여름방학도 끝나고 개학을 하였습니다. 올 여름방학엔 굳이 애써서 여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통한 짜릿한 휴식과 재충전의 누림이 없는 방학, 내게 참 낯설었습니다. 교사들에게 방학이란, 새 학기에 교실에 돌아가 학생들에게 나눌 귀한 경험치를 쌓는 기간입니다. 연수를 하고, 여행을 하며,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쓸 연장의 날을 갈아 세우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8월 말, 국가가 인정하는 휴식을 가질 것입니다. 이젠 곧 일상이 쭉 방학이 됩니다. 그래서 8월은 그냥 주변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터전 돌보는 일에 신경을 썼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어떤 마음이냐고 묻습니다. 처음엔 그냥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자유롭고 홀가분할 것만 같았습니다. 33년 교사로, 3.6년 교감으로, 1.6년 교장으로, 내가 돌아보아도 참 긴 항해입니다. 그 항해를 마무리한다고 하니, 숙제를 다 끝내고 선생님의 검사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으며,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내가 부지런히 나를 일으켜 세웠고, 누구보다 학생들을 사랑했기에, 나 스스로 토닥토닥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주고 싶습니다. 교사 생활 기록부 종합란이 있다면 이렇게 써 주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참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부단히 연마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높였고, 교사로서 교실 수업 개선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왔기에 그 노고를 인정할 만하다. 또한, 교장으로서 학교를 사랑하고, 학생들 성장을 도모하고, 교사들을 존중하며, 행복한 학교 현장 조성에 정진한 점을 높이 인정한다’라고요.

그런데, 섭섭한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며칠 전, 방학 중 근무를 마치고 홀로 완도 신지 명사십리를 찾아 맨발 걷기를 하였습니다. 낮의 해가 저물고, 저녁이 마중 나오며,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그 지점은 마치 부끄러운 만남이라도 하는 듯, 분홍빛으로 물이 들었습니다. 해가 지는 서쪽 땅은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오묘한 감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떠나야 하는구나, 이젠 이 부드럽게 발을 간지럽히는 고운 모래 밟기를 만나기 힘들겠구나. 문득, 슬픔이 쓸쓸하게 내 마음에 차 올라왔습니다. 열 개가 넘는 학교를 옮겨 다녔고, 수없이 많은 이별을 했는데, 이런 감상은 무던한 나에게 이 나이에 가당치 않다고 떨쳐 버렸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서 나의 뒤안길을 받아들이자. 그냥 나의 길을 가자. 인생은 원래 이렇게 쓸쓸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를 응원해 주십니다. 국가가 나에게 애썼다고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한다고 합니다. 학교에선 교감, 교무행정사가 함께 나의 정년을 기념하는 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방학 내내 낑낑대며, 완도중 항해편지를 모으고, ‘배움의 정원’ 글을 모아서, 나의 삶을 담은 책을 편집하느라 애를 씁니다. 선배 교장 언니는 그동안 찍어 모은 사진들을 모아 동영상 편집을 하느라 또 애를 씁니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나서서, 아내를 위로하고 엄마를 응원하는 편지를 써서 줍니다.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도 고마운 이들이 한마디씩 적어 정성스러운 롤링페이퍼를 만들어 줍니다. 20년 전 제자들이 교수가 되어, 교사가 되어 나의 교직생활이 참 보람찬 것이었음을 증언하는 편지를 써 문집에 한 페이지를 채워 줍니다. 완도중에서 1년간 함께 생활했지만, 나에게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받았(다고 말하)고, 더불어 나에게 큰 감동과 기대를 전해 준 한 아이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 줍니다. 여고 친구들은 그동안 애썼다고 밥을 사주고, 같이 놀아주고, 멋진 선물로 감동을 줍니다. 동료들도 아쉬움을 표하며, 갖은 정성을 베풀어 줍니다. 후배 교사들은 퇴임식을 준비하며, 선배 교사에게 최대한의 예를 갖추겠다고들 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환대를 받아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나는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고, 원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인 것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들에 감동하고, 감탄하며, 기꺼이 또박또박 받으며 감사를 보낼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한 사람이 새 인생을 출발하는데, 온 마을이 도왔고 온 학교가 나섰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또 학교 밖으로 나가서 그동안 받은 사랑과 도움을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나누고, 나의 미약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뜨거운 여름이 물러가면 가을이 다가와 초목들은 열매와 씨를 맺습니다. 자연의 순리처럼 아름다운 역사가 있을까요? 나는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은근하게 사회에 스며들어, 아름답게 열매를 맺고, 씨알을 흘려보내, 또 다른 새롭고도 진기한 세상의 싹이 트는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임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