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노영필>나를 사랑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2024년 08월 18일(일) 17:56
노영필 교육평론가
“저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학습 상담을 하던 A가 자신에게는 진단된 내용을 끌고 갈 힘이 없어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학생들과 상담할 때 종종 마주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매번 당황스럽다.

상담이 아이에게 구체적이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처음부터 자신의 성적표와 시험지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차근차근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다. 단박에 문제점을 갈파하고 싶어도 바로 솔루션을 제시한다거나 한 번에 방법을 찾으려는 욕심으로 덤비게 되면 과부하가 될 수 있어서다. 상담은 서로 노력해 가는 과정이지 한쪽의 전능한 능력을 수혈받는 것이 아니다.

상담에서 조력자가 돼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유도하는 과정은 늘 만만치 않다. 전반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적 혜안을 가졌다면 애초부터 학습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비법을 얻으려고 찾아온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담의 최종 목표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목표설정이 적절한지, 그에 따른 방법이 적절한지는 결국 학습의 주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의외로 출발점이 돼야 할 자기 탐구부터 안 된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학생들의 교육활동 중에 상당수가 어떠한 탐구활동인데 정작 자아 탐구는 너무 막연하고 어려운 것일까? 사실 자기를 들여다볼 시간도, 기회도 없으니 배우는 즐거움을 전제로 하는 탐구활동, 그것도 자아 탐구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른다.

방학 동안 과제를 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정성스럽게 안내했다. 성적에 반영되지 않은 조건이지만 학기 중 부족했던 활동을 보충할 의도였다. 지난 학기 배운 내용 중에서 자신이 심화 탐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주제를 정해서 독서하거나 토론 활동을 진행한 다음 정리해 보는 주제 탐구형 과제였다. 하지만 10%의 학생도 제출하지 않았다. 성적과 상관이 없어서였을까, 너무 어려운 숙제를 제시했던 것일까? 극소수에 그친 제출 결과는 원인을 찾는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무관심은 어디서 왔을까, 이 자포자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느 시기부터 의욕이 꺾이고, 동기부여를 잃게 됐을까.

학교는 탐구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진단하고, 대학 입시 시험 기술만 익히고 있다고 탓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학습 의욕을 꺾는 근본적인 무기력은 어디서 왔을까? 반대로 버티고 있는 아이들은 어디서 만들어진 투지일까?

그냥 ‘열심히 하자’는 의미 없다. ‘~을 열심히 한다’거나 ‘~의 ~을 열심히 한다’로 구체적일 때 의미가 살아난다. 바꿔 말하면 나를 둘러싼 사소한 문제가 큰 변화의 축이 된다. 그런 나를 분석할 힘이 없으면 나는 ‘왜 공부하고 있는지’ 정리할 수 없다.

요즘 공부와 씨름하는 아이들은 여유가 없다. 입시성적을 겨냥하고 경쟁우위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문제 풀이 힘을 키우는 게 전부다. ‘왜 그렇게 되는 거지?’를 던지며, 내가 찾아보고 싶은 것, 내가 흥미로운 것을 탐구하는 재미, 알아가는 재미를 만나는 공부는 부재중이다.

방법을 찾으러 다녀도 일확천금을 노리듯이 한 번에 공부 잘하는 능력을 만들고자 덤빈다. 상담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해도 다음에 찾아오지 않은 이유다. 잘할 욕심만 있지 자기 정리와 자기 응용이 안 되니 무엇을 어떻게 다시 상담해야 할지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아이들과 학습 상담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분위기다.

그래서 공부와 관련된 컨설팅보다 먼저 자신의 생활에 관심을 어느 정도 두고 있는지 묻는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해한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수업 준비를 하는지, 등교하면서 오늘 수업은 어떤 과목인지, 수업이 끝나고도 수업 내용을 되짚어 보는지 다시 묻는다. 사소하기 짝이 없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당황해하는 학생이 더 많다. 그런 태도가 자신을 향한 관심이고 사랑이라고 덧붙이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기실 우리 교육은 자신을 학대하게 만드는 교육 풍토가 확산돼 있다. 성적 결과를 두고 못했더라도 칭찬을 먼저 하는 풍토가 아니라 자신을 깎아내리고 좌절하게 만든다. ‘괜찮아’, 토닥이며 고생했다고 격려하는 게 아니라 ‘그것밖에 못 했냐’는 비난부터 한다. 경쟁의 비극적 논리다. 왜,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껴안고 가도록 인도하지 않고 남의 잣대인 어른들의 논리에 묶여 살게 하는가!

지금까지 교육은 나를 고통스럽게 학대해야 성과를 만든다는 논리를 권장했다. 그래서 지진 경보가 울려도 피난을 권하는 게 아니라 고3은 참아야 한다고 권하는 헤프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왜 즐겁게 놀면서 공부할 수 없을까? 그 이유는 ‘나를 사랑하도록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교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