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연권>연꽃에서 배우는 인생의 교훈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2024년 07월 24일(수) 17:32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7월의 연꽃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여기저기 연꽃 피는 소식이 들려오니 분명 연꽃 세상이 왔나 보다. 세상은 엉망진창임에도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은 아름답기만 하다. 초록 잎 위에 피어난 백련과 홍련 꽃송이가 찬란하게 빛난다. “세상은 색으로 이뤄졌구나”라는 말에 실감한다.

연꽃과 인연은 군대에서 비롯됐다. 파견 나갔던 부대 식당에 쓰인 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 아침이슬은 묻을망정 진흙은 묻지 않고, 고상한 기개와 같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청렴결백함과 검소한 기품을 간직하는 승전운동 정신을 말한다.” 이 글을 식사때마다 봤고 추억록에 후임병이 써놓아 지금도 가끔 읽어보며 젊은 날을 추억해 본다. 전역한 뒤 이 글이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나왔음을 알았다. 필자가 야생화 연구와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단초가 된 것도 이때부터다.

새벽과 아침 경계에 연지(蓮池)로 발길을 향했다. 심란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허탈하면서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연꽃을 바라봤다. 내가 꽃이 되고 꽃이 내가 되는 시간이다. 연꽃 세계에 들어간 나를 발견하게 됐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 자신을 돌아봤다.

아침이슬을 밟으며 풀벌레 소리를 따라 걸었다. 뻐꾸기 소리가 화답한다.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며 춤을 추니 잔물결이 일어 고요함을 깨우고 있다. 구만제의 연지는 러브(Love) 모양의 데크와 홍련과 백련 등이 구간별로 식재돼 색다른 면을 보여준다. 순결한 백련이 밤을 잠재우고 있다. 화사한 홍련이 아침을 깨우러 준비하고 있다. 수련은 수런수런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꽃 무리가 사치스럽거나 교만하지 않다. 자태가 고상하고 품위 있다. 다정한 정감과 친근하면서 볼수록 사랑스럽다.

물안개에 젖은 데크를 뚜벅뚜벅 걷는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향기가 다칠까 봐 조심스럽다. 맑고 은은한 향기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향기에 취하여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벤치에도 앉아 멍하니 풍광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꽃송이가 우아하고 기품있게 맞이한다. 꽃 속으로 스며든 빛은 꽃을 휘감아 아름답다. 고추잠자리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제 막 우화 해 날개를 말리는 중인가 보다. 꿀벌들도 찾아와 꽃 품속으로 안긴다. 나비도 동행하며 입체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빗속에서 연꽃 풍경을 보고 싶었다. ‘한시 이야기(정민)’에 소개된 최해의 ‘빗속의 연꽃’ 시(詩)가 큰 감명을 줬기 때문이다. “푸른 옥으로 됫박을 만들어 하루종일 맑은 구슬을 담고 담는다.”는 구절이 좋아 비가 내리자 달려갔다. 눈앞에 필설로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혼자 있는 연지가 편안했다. 평화였다. 누가 보면 청승맞다고 할 정도로 멍하니 연잎을 바라보았다. 후드득 후드득 연잎으로 세찬 비가 내린다. 그런데 연잎이 깨끗하고 비에 젖지 않을까 궁금했다.

‘KISTI의 과학향기’에 답이 있다. 연꽃잎 표면은 3∼10㎛ 크기 융기들로 덮여 있고 발수성으로 코팅돼 있다. 이러한 구조 덕택에 연잎 위에 떨어진 물방울은 잎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리게 된다. 연꽃잎과 물방울의 접촉 면적은 2~3%밖에 되지 않는다. 물방울이 공기 위에 떠서 있는 모양이다. 학술적으로 ‘연꽃잎 효과(lotus effect)’라 한다.

빗물은 송알송알 옥구슬이 돼 또르르 잎 가운데로 모여 대략 30초에 한 번씩 비워졌다. 됫박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고인 물을 잡아봤다. 한 손에 들어왔다 나가는 정도다. 빗소리가 연잎 사이로 숨어든다. 숨어있던 향기가 나와 빗물과 연잎 등 교집합으로 신묘한 향이 됐다. 세찬 비는 동편제 소리처럼 우렁차고 기개가 넘친다. 바람에 연잎이 부딪치는 소리는 북소리같이 들렸다. 새소리는 추임새였다. 연밥의 마이크로 구례를 넘어 대한민국에 울려 퍼졌으리라~.

연꽃과 연잎을 있게 지탱해 준 게 뭘까 생각한다. 바로 뿌리가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양분과 물을 공급하는 연근(蓮根)이다. 연근에는 구멍이 8~11개 정도 되나 보통 9개가 있다. 여기로 산소가 들어가 쑥쑥 자라게 하는 생명 혈(穴)이다. 뿌리 덕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런데 꽃만이 고고하고 깨끗한가? 진흙이 더러움의 상징이요 대명사인가? 아니다. 연꽃이 피는 연지의 흙은 더럽지 않다. 물도 깨끗하고 정갈하다. 전체를 정확히 보고 양쪽을 살펴본 후 판단하면 오해나 다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일은 그러하지 않다. 억울하고 답답한 내 마음을 대변하여 주고 있구나.

연꽃 세계의 신묘함에 감탄하면서 마음이 정리됐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만나며 새는 둥지를 떠나야 날 수 있다.”는 말을 음미해 본다. 나 자신을 성찰한다. 원망과 미움이 사그라졌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머리가 맑아진다. 그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살자. 이제 내 인생을 살자. 나는 자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