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하정호>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
하정호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 과장
2024년 07월 21일(일) 18:08
하정호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 과장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은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으며 처음 보았다.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마음을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아’하고 여태 이 말뜻을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알고 있는 바를 깨뜨리는 게 너무 어렵다는 뜻이었다. “공부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인식틀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마음이 열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내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아하, 그렇지’하는 놀라움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고 마음 열림도 없다. 그렇게 마음이 열려야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인식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신영복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이 공부라 하셨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가르침을 ‘아하, 그게 이 뜻이었구나’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마음이 열리고,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긴 여행도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라고 하신다. 교사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학생의 ‘깨우침’이 없으면 배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의 담장 안에서, 교과서에 적혀 있는 지식을 주입해서는 깨달음이 일어나기 어렵다. 썩어문드러진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혁명정신을 주입하고 다시 군대로, 일터로, 전장으로 학생들을 내보내기에는 그런 학교가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학교는 이제 탈레반(이슬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인공지능 기반의 개별화 교육을 말하는 오늘이다. 하지만 그 인공지능도 학생들 각각에게 맞춤형 지식을 알려줄 수 있을 뿐, ‘깨달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에는 가슴,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결코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그 여행은 교사와 학생이 친구가 돼, 배운 지식을 삶 속에서 찾아가며 함께 떠나는 기나긴 여정이다.

‘OECD 교육 2030’에서는 학생들에게 ‘학습 나침반’을 쥐어줘야 한다고 했다. ‘좋은 삶(웰빙)’을 이루겠다는 모호한 목표를 향해서 교사와 학부모, 또래와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으며 ‘학습 나침반’을 들고 여행하는 것이 지금의 교육이다. 이는 ‘마음과 학습(Engaging Mind)’에서 브렌트 데이비스 등이 한 말과 맥이 같다. “가르치는 일은 주어진 지식을 주입해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속에서, 역사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환경의 새로운 연결방식을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그동안 혁신학교에서는 앎과 삶의 일치를 꿈꾸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오히려 앎과 삶의 불일치가 우리 삶의 조건이고 배움, 즉 깨우침과 깨달음의 시작점이다. 자신이 배운 것과 삶이 꼭 같지는 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학생들이 그 깨달음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다시 일치시키겠다는 용기를 지닐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배움이 시작된다. 확장학습은 앎과 삶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일어난다. 가르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려면 친구들과, 선생님과, 이웃과 더 많이 소통해야 하고, 더 많이 싸워야 하고, 더 많이 포용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틀이 깨어지고 앎의 전환과 삶의 전환인, 전환학습이 이뤄진다. 이제는 교사들에게도 지식 전수자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학생을 연결하는 매개자와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역할도 가르침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몇몇 마음 맞는 교사들끼리 교육과정을 다르게 구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앎에 미치지 못하는 삶의 현장을 어떻게 바꾸어갈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혁신학교를 넘어서 마을교육공동체와 학교의 자치가 더 확대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