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55>예술, 우리 안의 얼음바다를 깨는 도끼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2024년 07월 21일(일) 18:08
사진3_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_해변의 수도승(Monk by the Sea)_캔버스에 유채_110×172cm_1809년_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_북극해(Arctic Ocean)_캔버스에 유채_97.8×128.3cm_1824년_독일 함부르크미술관 소장.
체코의 천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평생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불안 속에서 글을 썼다. 그는 임종 전날까지도 새 작품의 교정지를 읽다가 사망했다. 카프카가 1904년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 속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라는 문장은 어쩌면 자신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는지 모른다. 그가 작품에서 그린 인물들은 자신의 삶처럼 불안과 우울에서 빠져나갈 통로가 없었으나 지금 그의 소설은 현재 고전 문학이자 문화유산으로 인간 존재로 운명의 부조리성과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는 통찰을 표현해 우리에게 또 다른 탈출구를 제시해주고 있다.

위 카프카의 문장에서 필자는 독일의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1824년 作 <북극해>를 떠올렸다. 그는 평생 황량하고 신비스러운 겨울 풍경을 주로 그렸다. 북극해를 떠다니는 두꺼운 얼음, 일부 얼음판이 부딪혀 쌓인 거대한 얼음산이 인간의 도전을 압도하는 자연의 무한한 힘, 그것에 대한 공포와 경이로움, 즉 ‘숭고(sublime)’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작가는 18세기 독일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아름다움’과 ‘숭고’를 미학적으로 구분하는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예술은 있는 ‘아름다움’과 달리 ‘숭고’는 가늠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에 대한 경탄의 쾌감, 두려움의 불쾌감을 동시에 수반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숭고의 미학’은 낭만주의 예술가들 작업의 주요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예술가는 자연과 풍경에 대한 성찰과 상징이고, 반고전주의적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담긴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

관찰자들은 프리드리히의 <북극해> 작품의 ‘얼음 바다’ 가 한없는 절망을 나타냈다고 추측했다. 작품의 초기 제목이 ‘희망 호의 난파’ 였던 것처럼, ‘희망’이라는 이름의 배가 빙산을 만나 좌초되고 회복 불가능하게 얼음장 밑으로 가라앉는 현실을 나타냈다는 것이라 해석했던 것이다. 작업을 할 당시 작가는 모처럼 자리가 난 드레스덴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Dresden) 정교수직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상태였고, 나폴레옹 전쟁(1803~15)이 끝난 후 독일 지역이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일어난 배경을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역을 침략한 나폴레옹에 반대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독일 지역이 나폴레옹 이전의 제후국 모임이 아닌 새로운 통일국가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보수반동적 분위기에서 독일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열풍은 시들어갔으며, 그 작가가 느낀 암울함이 작품 속의 ‘얼음 바다’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_안개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Sea of Fog)_캔버스에 유채_98.5×75cm_1818경_독일 함부르크미술관 소장.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 뿐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한다.”

프리드리히의 철학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작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1818)> 이다. 이 작품은 특히 연극적인 구성 요소와 특징을 보여준다. 화면의 구성은 강력한 파도가 치는 바다와 저 안개 넘어 건너의 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랑자의 중첩으로 나누어진다. 산과 파도는 안개에 가리워져 선명하게 칠해진 방랑자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는 작품에서 이상향으로 표현되는 바다 건너의 산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 지향적인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작품에서 고독하고 우아한 인물 앞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바다가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프리드리히가 결혼하던 해 제작된 이 작품은 젊은 아내를 위해 동요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던 개인적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30세 이후에 유화 작업을 시작했지만, 감정적으로 비틀린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사용한 어두운 색채의 깊이를 살펴보면 그가 유화를 당시에 재료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전시회에서 작가는 <해변의 수도승>을 공개했다. 이전 미술계에서 결코 볼 수 없던 파격적인 형식의 풍경화에 대해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독일의 작가, 극작가)는 “무한하고 균일한 공간 앞에서 마치 눈꺼풀이 잘려나간 것 같은 느낌” 이라고 묘사했다. “눈꺼풀이 잘려나갔다”는 표현은 모래 해변과 검은 바다 그리고 구름으로 가득 찬 어둑한 하늘이 이루는 수평선을 제외하고는 눈의 초점을 맞출 만한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캔버스 화면에 대한 평론가의 감상평을 잘 전달해주고 있다. 생명의 흔적을 모두 삼키고도 무심하기 그지없는 대자연을 마주선 수도승은 마치 세상 끝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무한성 앞에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혼돈과 절망, 무력감과 좌절감을 보여준다. 작가는 어린 나이에 가족의 잇따른 죽음과 사고로 치유할 수 없는 죄책감과 우울증을 평생 겪어야만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품 속 황량한 인물의 뒷모습은 당시 낭만주의 정신에 팽배했던 자연애의 경외심과 그 앞에서 무력한 인간 그리고 자신의 어두운 내면 상태를 구현하였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_삶의 단계_캔버스에 유채_72×94cm_1834년_독일 라이프치히미술관 소장.
마지막으로 프리드리히는 생애 말년의 시기 61세 때 <삶의 단계(The Stages of Life)>를 그렸다. 그가 젊은 시절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렸던 스케치들을 모아놓은 것과 가상의 장소를 묘사하였기 때문에 작가에게 매우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알아볼 만한 지리적 단서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풍경의 조합은 내면의 마음을 담은 자서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부분은 대략 작가의 고향인 그라이프스발트의 항구를 배경으로 다섯 척의 배는 인생의 단계,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변에서 물을 바라보고 서 있는 노인은 이 작품이 제작될 무렵의 프리드리히 자신으로 추정된다. 노인 근처에 서 있는 중절모를 쓴 젊은 남자는 프리드리히의 조카를 그린 것이며, 이 맥락에서 이 남자는 인생의 성숙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들 너머에 있는 우아한 젊은 여자는 청년기를 나타내며 프리드리히의 첫째 딸 모습을 보고 그린 것이다. 스웨덴 국기를 들고 노는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작가 자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십자가 형태의 돛대를 가진 중앙의 배는 프리드리히의 깊은 신앙심을 나타낸다. 고요하고 빛으로 가득하며 시적인 이 작품은 속죄의 희망이나 사후 천국에 대한 열망으로 차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이 매우 값진 것이며 덧없이 지나가버린다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인식으로 충만하다.

아직까지도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고전적 작가로 남아있다. 그의 작품 속 안개와 눈보라의 몽환적인 세계와 자연 풍경들은 영화, 사진,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오마주(hommage) 하거나 차용하는 사례로 구현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공통 된 주제들은 인간과 대자연의 관계, 영원과 유한한 삶과 죽음이 연결 된 생의 관계성에 근본적인 질문들이었고, 자신만의 숭고한 미학으로 해석한 회화로 남겨져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현재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는 작가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