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잊혀진 태봉마을
노병하 취재1부 정치부장
2024년 06월 03일(월) 18:15
어떤 무엇인가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어진다는 것은<> ‘존재 가치가 소멸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가치’란 그것이 실재하던 혹은 사라졌던 간에 여러 방면에서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 흔적이 다른 이의 기억을 통해 뻗어 나가고 상기 되면서 생명을 이어간다. 그래서 ‘존재가치’란 ‘인류의 역사’이고, ‘발전의 원동력’이며, ‘미래로 가는 열쇠’라고 포괄적으로 해석할수 있다.

여기 한 마을이 있다. 무등산 밑에 자리잡은 광주 동구의 태봉마을이다. 이곳에서는 1980년 5월 당시 지역방위군이 편성됐다. 그들이 총을 든 것은 무장한 군인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거대 권력에 맞섰고, 훌륭히 싸웠으며 평화롭게 총을 내려놨다. 하지만 그 댓가는 참혹했다. 지독한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이 터져나왔고, 이웃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됐다. 불신과 분노가 뒤섞이면서 결국 하나둘 사람들은 떠났다.

그렇게 44년이 지난 2024년, 전남일보 사회부 기자가 방문했던 마을 어귀에는 2016년 만들어진 ‘오월 이야기’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었다. 글씨는 갈라졌고, 세월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것은 태봉마을을 닮아 있었다.

마을입구는 소방차가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좁았고 CCTV도 마을 입구에 한대만 설치돼 있었다. 일부 구역에는 도시가스 조차 안들어왔다. 해양에너지 동북지사에 따르면 마을 입구부터 경로당까지는 도시가스가 설치됐으나, 경로당부터 태봉산까지 주거지역에는 주민 반대 등으로 설치가 무산됐다.

주민은 왜 반대했을까? 마을 주민 김모씨는 “5·18 마을 되면 어떻게 도시가 발전 되는지, 어떤 혜택이 있는지 모르겠다. 동네가 발전하기 위해서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마음에 깊게 남은 상처가 여전하다는 의미다.

이 마을을 찾은 본보의 기자들은 오월 특집을 취재하면서 곳곳에 여전한 그날의 생채기를 확인할수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 가슴 속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국가 폭력은 80년 오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켜주던 이들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았다. 그 골은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은 채, 반목과 불신으로 계속 커져만 왔고 마을은 5·18의 기억에서조차 멀어져 갔다.

기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무엇이 이들을 갈라 놓았고, 어떤 것이 이들을 잊혀지게 했으며,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돼야 하는지에 대한 보도를 하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이어진 2024년 오월 특집은 그렇게 구성이 됐고, 지난 5월6일부터 16일까지 연재됐다.

기사가 나가고 난 뒤 동구청과 동구의회는 태봉마을을 주남마을처럼 조성하고 가꿔야 한다고 의지를 표명했다.

광주 동구의회 박종균 의원은 “의회에서도 의지를 갖고 추진하겠다. 일부 마을주민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아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마을주민과의 접촉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임택 동구청장도 “배고픈 다리에서 주남마을과 태봉마을, 시내를 잇는 5·18 사적지 코스도 만들 생각이 있다“면서 “5·18 사적지로서의 역사적인 역사문화마을로 조성해 나가면 좋을거라고 생각한다. 인문도시를 지향하고 있어 기념행사도 열고 싶지만, 일부 토지 소유자들이 역사 문화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데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다. 행정이 원한다고 무조건 추진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래, 반대하는 이는 반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찬성하는 이가 이유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 문을 두들기지 않으면 그저 잊혀져 없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이 타인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것은 매우 고귀한 일이다. 더욱이 그것이 가족 공동체, 나아가 지역 공동체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당연히 그 가치는 오래토록 기억돼야 한다.

대처 오월 정신이라 함은 ‘불의에 맞서는 분노’ 속에서도 ‘타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인간애’를 포함하는 것 아닌가.

이제 광주가 태봉마을을 향해 손을 내밀어 줄 때다.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을 두들겨 44년 그날처럼 어우러져 서로를 부등켜 안게 해야 할 때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