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역사와 문화, 자연 어우러져… 체험거리 ‘지천’
●담양 잣정
큰 잣나무와 정자 있다해 ‘잣정’
죽림재·죽림사·관수정 품은 마을
사철 아름다움 뽐내는 죽림서원
봄엔 매화, 산수유꽃 등 꽃대궐.
가을단풍, 겨울설경 단아·고즈넉
유월그믐제…마을의 자랑 ‘갱엿’
큰 잣나무와 정자 있다해 ‘잣정’
죽림재·죽림사·관수정 품은 마을
사철 아름다움 뽐내는 죽림서원
봄엔 매화, 산수유꽃 등 꽃대궐.
가을단풍, 겨울설경 단아·고즈넉
유월그믐제…마을의 자랑 ‘갱엿’
2024년 01월 25일(목) 10:46 |
관가정과 느티나무. 잣정마을 앞 들판에 우뚝 서 있다. |
세일재. 글을 익히는 이들의 강당이다. |
연못과 장서각. 겨울비가 내린 날 풍경이다. |
죽림재.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로 니붕은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다. |
내력이 더 깊은 누정도 있다. 독수정(獨守亭)은 조선 초에 건립됐다.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이 세웠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혼자라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건물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는 아침마다 고려의 옛 도읍지 개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겠다는 마음도 되새겼다.
월봉산 자락에 상월정(上月亭)도 있다. 1457년 김자수가 대자암 터에 세웠다. 누정의 주인은 이경을 거쳐 고인후로 바뀌었다. 산속의 고시원으로 불리며 ‘창흥의숙’의 터전으로 활용됐다. 근대교육의 요람으로, 현 창평초등학교의 전신으로 본다.
상월정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누정이 죽림재(竹林齋)다. 창녕조씨 죽림 조수문(1426∼?)이 문중의 자제를 가르칠 목적으로 지었다. 글방이고 공부방인 셈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23년에 다시 지었다. 뒤이어 죽림사(竹林祠)가 더해졌다. 강학과 추모의 공간으로 쓰였다. 일반적인 누정이 지니는 별서의 성격은 덜했다.
죽림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 1948년에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로 다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다. 죽림사에는 조수문과 아들 조호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마을사람들은 죽림재와 죽림사 일대를 죽림서원으로 부른다.
죽림서원은 죽림재, 죽림사, 세일재, 취사루, 육영당, 정일재, 장서각 등으로 이뤄져 있다. 세일재는 강당, 취사루는 잠을 자는 공간이다. 서원은 사철 아름다움을 뽐낸다. 봄엔 매화, 산수유꽃, 목련꽃이 흐드러져 꽃대궐을 이룬다. 가을날의 단풍도, 겨울날 눈 내린 풍경도 단아하고 고즈넉하다.
서원에 충효정려도 보인다. 정려는 조부(1593~1656)의 충의와 효행을 기리고 있다. 조부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부친의 장례 땐 움막을 지어 3년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죽림재를 지은 조수문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빼어나고, 효심이 깊었다.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나, 벼슬길을 한사코 마다했다. 고향에서 학문 탐구에 전념하며, 강론을 일상으로 삼았다. ‘근본이 견고해야 잎과 가지가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왕성해야 흐르는 물줄기가 길다(根本固而枝葉茂, 泉源壯矣派流長)’고 적혀있는 취사당의 주련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수문은 점필재 김종직과도 교유하며 지냈다. 점필재는 ‘조수문이야말로 호남의 진짜 유학자’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 관수정도 있다. 계월당 조여충(1491∼1573)이 1544년에 세운 정자다. 증암천과 창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관수정을 품은 향백산 솔숲도 소중하다. 관수정에서 광주호반을 따라 개선사지로 이어지는 숲길도 좋다.
가까이에 수남학구당도 있다. 조수문의 손자 환학당 조여심(1518∼1594)이 앞장서 만든 자율 고등교육기관이다. 수북학구당과 함께 지역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다.
죽림재와 죽림사, 관수정을 품은 마을이 잣정마을이다. 잣정마을은 용대마을과 함께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 속한다. 큰 잣나무와 정자가 있다고 이름 붙여졌다. 창녕조씨가 많이 살고 있다.
잣정마을은 증암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증암천은 창계천, 자미탄으로도 불린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물은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죽림재 등 문화유산을 품고 영산강으로 향한다. 마을은 광주호 아래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죽림재는 마을 위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잣정마을의 역사와 전통이 깊다. 오래된 집도 여기저기 보인다. 지은 지 100년 넘은 한옥도 있다. 천막으로 덮여 있어 쇠락해 보이지만, 겉으로 풍기는 가풍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때 밀직사를 지낸 조준을 중시조로 한 창녕조씨 밀직사공파의 종갓집이다. 밀직사는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등의 정사를 맡은 관서를 일컫는다.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쯤 된다. 종갓집은 조은환 종가로 불린다.
동호당 조은환은 선조(조여신)와 제봉 고경명 등이 함께 교유하던 곳에 소산정(小山亭)도 지었다. 소산정은 증암천이 연못을 이루는 용대마을의 바위 벼랑(용담대)에 서 있다. 선조를 기리는 후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작일촌(自作一村)을 이룬 주민들은 한가족처럼 살고 있다. 해마다 음력 6월 말에 세일재에서 유월그믐제를 지낸다. 유월그믐제는 창녕조씨 후손과 주민이 한데 모여 마을 입도조 등을 기리며, 친목도 다지는 자리다.
마을주민의 화합은 겨울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마을에서 자랑하는 쌀엿도 함께 만든다. 갱엿을 길게 늘여 엿으로 만드는 작업은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낙네들이 마주 보고 앉아 갱엿을 양쪽으로 밀고 당기기를 되풀이해야 한다. ‘밀당’을 할수록 갱엿이 쭉-쭉- 늘어나고, 주황빛의 갱엿이 하얗게 변하면서 엿이 된다. 엿 속에 구멍도 숭-숭- 뚫리면서 바삭바삭한 맛을 더한다. 오랜 전통의 쌀엿으로 옛 추억까지 끄집어내 주는 잣정마을이다.
잣정마을은 역사와 문화,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인문학과 체험거리도 지천이다. 마을이 광주광역시에서 가깝고, 평소 많은 사람이 지나는 길목이라는 것도 큰 강점이다. 서 말의 구슬을 제대로 꿸 일만 남았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