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아침을 열며·정연권> 목화꽃과 어머니 사랑
정연권 구례군도시재생지원센터장
2023년 10월 11일(수) 12:44 |
정연권 센터장 |
목화 종자를 어렵게 구했다. 종자를 물에 2시간 담근 후 심어야 하는데 깜박 잊고 3일 후 보았더니 뿌리가 살짝 보였다. 바로 파종했더니 모두 발아해 건실한 묘가 됐다. 실수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화분에 심어 국화와 같이 관리했더니 초록색이 잎이 싱그럽게 자라 유백색 꽃을 피웠다. 무궁화처럼 아욱과로 꽃 모양이 비슷하다. 오후에 핑크빛으로 변하더니 1~2일 뒤 꽃잎 세포액이 산성화되면서 붉은색으로 변하며 꽃잎이 진다. 이후 다래가 생기더니 순백의 솜이 터져 나와 또다시 꽃을 피웠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 종자를 원나라에서 몰래 가져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게 했다는 얘기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유배지가 베트남 하노이 근처라 한다. 당시 목화를 ‘길패(吉貝)’라 했다. 백제 시대에 목화가 있었고 면직물까지 있었다. 종자반출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목화 보급을 위한 애민 정신과 종자를 무료로 나눠주며 백성들에게 대중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조 대왕은 왕비를 간택할 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순왕후는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 왕비로 간택됐다고 한다. 목화는 정순왕후 말처럼 화려한 꽃이 아닌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름다운 사랑 꽃이다.
유럽에서는 수입한 목화가 양털과 비슷하다 해 ‘양(羊)이 열리는 나무’라 불렀다. 이는 존 맨드빌(John Mandeville)이 1350년 저술한 ‘맨드빌의 여행’ 책에서 “인도에는 가지 끝에 작은 새끼 양을 낳는 기이한 나무가 있다”고 쓴 문구에서 비롯됐다.
미국 남북전쟁 원인인 흑인 노예해방과 연관된 것도 역시 목화다. 당시 남부는 풍부한 물과 온화한 날씨로 목화 농사를 지어 큰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력이 너무 많이 들어 흑인 노예를 쓰고 있었다. 이들에게 노예해방은 받을 수 없는 정책이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인 애틀랜타 드넓은 목화밭 풍경이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목화 관련 얘기는 많다. 어머니에 관한 목화 이야기가 생생하고 어릴 적 추억에 맞물려 아련하다. 어머니는 목화를 ‘미영’이라 불렀다. 봄이 되면 나뭇재에 버무려 심어놓고 가꿨다. 미영 밭은 학교 가는 길목 있었기에 다래가 열리면 몇 개씩 따먹었다. 달콤하면서 시큼했다. 먹을 게 귀한 시기라 먹었지만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목화를 수확해 솜을 타오면 마루와 방에는 하얀 세상이 돼 포근했다.
물레타령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생각나고 가슴에서 메아리친다. 전라도 민요라 더욱 그런가 보다. 물레를 아는 사람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다. 물레는 목화솜에서 실을 자아내는 고된 일의 하나였다. 아픔과 한(恨) 서린 물레다. 어머니는 윙~윙~윙~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리고 왼손에 든 솜 꼬치에서 하얀 실을 뽑아냈다. 물레 소리에 장단을 맞춰 어머니의 고단한 손은 허공에서 위무하듯 위아래로 춤췄다. 무심한 나는 목화솜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단잠에 빠졌었다. 새벽 잠결에도 윙윙 물레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쪽잠을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 물레를 돌렸던 것.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어머니가 그립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모습이 목화에서 피어난다.
목화에서 뽑은 실은 마당에 길게 늘어놓고 숯불을 피워 놓고 풀메기 작업을 했다. 베틀에 씨줄과 날줄을 엮고 북통을 좌우로 오가며 철커덕 철커덕 무명베를 짰다. 밤에 호롱불을 밝히며 한자 두자 20자를 짜면 1필이 됐다. 어머니의 피땀이요 시간을 엮은 것이다. 목화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적절하다. 어머니는 길쌈하고 베를 짜는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을까. 고독한 시간이요 졸음과 싸움이었다. 어머니는 철인이었다.
그래도 “공부 잘해라”, “몸조심해라”, “밥 많이 먹어라”하며 살뜰하게 챙기셨다. 어머니의 헌신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다. 감사한 마음 갚을 길 없어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처럼 자녀들에게 정과 사랑을 베풀고 주위에도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