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의 역사속 생업>16세기부터 가장 많은 논.밭

농토 규모 전라도 단연 1위
가호당 가족 수 가장 적어
개개인 소득 수준.경제력 높아
2018년 09월 06일(목) 21:00
‘고산 윤선도 사적비’, ‘굴포 신당 유적비’(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윤선도가 제방을 막아 농토를 조성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다. 필자제공
유형원은 한 시에서 전라도의 지세를 한마디로 “동국 땅 산지가 많은데, 이곳에 오직 벌판이 넓게 열려 있네”라고 읊었다. 그리고 그는 ‘’반계수록‘에서 “우리나라 조세 중에서 호남에서 나오는 것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방문한 명나라 장수들도 “湖南은 國之根本이다”고 말하였다. 이상은 전라도는 들판이 넓고 세금을 많이 내는 곳이라는 말이다. 전라도가 조선 경제의 중심지였다는 말로 해석된다. 왜 그랬을까?

최다 논밭토지조사사업을 양전(量田)이라고 한다. 양전은 고려시대에도 행해졌지만, 그 통계 수치는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조선왕조는 20년마다 양전을 실시한다고 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워낙 경비가 많이 들어 자주 하지는 못했다. 토지대장을 양안(量案)이라고 한다. 양안은 3부 작성되어 호조, 감영, 본읍에 각각 보관되었다. 순천의 경우 서청(書廳)이라는 곳에 ’무진대장(戊辰大帳)‘, 즉 무진년에 작성한 토지대장 36권이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전라도의 양안으로는 18세기에 작성된 전주, 고산, 임실, 남원, 화순, 능주, 순천의 것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경제에서 지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보가 들어 있으니, 누군가 양안을 연구하면 좋을 성 싶다.조선시대에 지역별 토지 규모 기록은 건국 직후인 1404년(태종 4)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과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라도는 경상도나 충청도.평안도 다음으로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5세기에는 전국 3위 정도의 농지를 전라도에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라도는 농토가 많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후대를 토대로 미루어 짐작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상황이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농사짓는 연작법, 모를 길러 옮기는 모내기법, 1년에 2회 농사짓는 2모작 등과 같은 새로운 농사기술이 보급되면서 농지 개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와 짝을 이뤄 토지 현황을 파악하는 양전사업 또한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조선의 전체 경작지가 분명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전라도의 농지가 크게 증가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 야산과 저습지 및 갯벌을 개간한 결과였다. 농사짓기에 유리한 전라도의 자연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노력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전라도는 16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상도를 제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논과 밭을 보유하고 있다. 영역에 있어서는 경상도를 따라갈 수 없지만, 농토 규모에 있어서는 전라도가 단연 전국 1위였다. 전라도 전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그치고, 농가당 농토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로 주제를 돌려보자. 18세기 중엽 자료인 ‘여지도서’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전라도의 가호당 인구수가 낮게 나타난다. 대가족에서 분가한 독립 가호가 많았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가호당 농토면적은 전라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다(허원영, ‘18세기 중엽 조선의 호구와 전결의 지역적 분포’). 위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①농토가 가장 많다는 점에서 전라도의 경제력이 전국에서 제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②가호당 보유 농지가 가장 많다는 점에서 전라도 각 가정의 경제력이 전국에서 제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③가호당 가족 수가 가장 적었다는 점에서 전라도 사람들 개개인의 소득 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④가족이 되었건, 개인이 되었건 간에 높은 경제력은 문화적 수요를 높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죽세공품 같은 다양한 수공업품의 개발, 판소리 같은 창의적인 예술의 발전이 그에 상응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한다.

간척지, 호남사림의 물적기반 1904년의 토지 조사에서 전국에서 가장 토지가 많은 3도를 보면, 전라남도 147,161결(전체의 14.8%), 경상북도 122,455결(12.3%), 전라북도 102,511결(10.3%)로 나타났다. 역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전국의 25%를 차지한다. 조선 8도 가운데 전라도 한 도가 전국 농토를 무려 1/4이나 차지한 것이다. 이는 전라도의 넓은 갯벌에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한 결과였다. 사실 톱니처럼 들쑥날쑥한 전라도 바닷가에는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은 바다에 둑을 쌓고 바닷물을 막아 갯벌을 농토로 만들었다. 갯벌을 막아서 만든 농토를 보통 언전(堰田)이라고 하는데, 전라도에 특히 많았다. 그래서 전라도의 발전사는 갯벌의 개간사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 싶다. 전라도에 간척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현재 16세기부터 확인되고 있다. 일반 서민들이 생계 차원에서 바닷물이 일 년에 한두 번 들어오는 황무지 같은 갯벌을 적은 노력을 들여 농토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역의 힘 있는 양반들이 제법 큰 규모로 넓은 간척지를 만드는 일을 펼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광주사람 송제민이 영광에 간척지 공사를 벌였다. 갯벌을 막는 데에 소요되는 소나무 1백여 주를 허가 없이 샀다가 전라우수사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소나무 벌목 단속권이 있는 해남 우수영에 불려가 포목 1천필을 벌금으로 물게 될 형편이었다. 송제민은 하는 수 없이 당고모부 유희춘에게 찾아가 구해줄 것을 청했고, 유희춘은 우수사에게 벌금을 모면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어 해결해 주었다(김덕진, ?해광 송제민이 학문성향과 의병활동?). 이 사례를 통해 간척지가 16세기에 전라도 사림이 성장하는 데에 큰 물적 기반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사실 16세기 문인은 죄다 전라도에서 배출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허균은 중종 때 전라도 출신의 인재로 현달한 자,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진 자가 매우 많았다면서 눌재 박상부터 제봉 고경명까지 17인을 들었다. 그리고 이수광은 선조 치세 때에 시인은 전라도 많이 나왔다면서 박상, 임억령, 임형수, 김인후, 양응정, 박순, 최경창, 백광훈, 임제, 고경명 등을 들었다. 전라도에서 간척 관련 문서를 대량으로 남긴 대표적인 집안은 해남에 세거해 온 해남윤씨 가문이다(정윤섭, ?16~18세기 해남윤씨가의 해언전 개발과정과 배경?). 그들은 일찍이 바다 경영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보길도, 청산도, 소안도, 평일도, 진도 등지에 간척지를 두었다. 뜬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윤선도(1587~1674)는 현재의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3백미터 제방을 쌓아 2백 정보를 간척했다. 먹고 살게 해주어 고맙다고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유적비를 세워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현재의 방조제는 1940년에 다시 쌓은 것이니, 윤씨가에서 쌓은 제방이 3백년 동안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이다. 그리고 해남윤씨는 진도 맹골도를 매입하여 그곳 특산물 미역, 김, 톳을 확보했다. 순천 양반들은 남쪽 바다 긴 만의 좁은 목 입구에 둑을 막았다. 둑은 별량면과 하사면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다. 둑 중간에 다리[검석교] 역할을 하는 판문(板門)을 설치했다.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에 판자문을 열어 민물이 나가게 하고, 바닷물이 들어오려고 하면 문을 닫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리하여 둑 안쪽은 기름진 벌판이 몇 십리 뻗어 있고, 바닷물이 철썩이는 바깥에는 장사배가 와서 정박했다. 갯벌 둑 하나로 세 가지 효과를 보고 있었다. 18세기 순천 사람 조현범이 지은 ’강남악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서민들도 간척지 공사를 펼치다. 특히 양란 때부터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들이 펼친 간척지 공사는 섬의 위상을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신안 비금도의 경우 이주민들의 간척에 의해 17~18세기에 14개의 부속도서가 없어져버렸다. 매립하여 하나로 만들었다는 말이다(김경옥, ‘19-20세기 비금도 간척지의 조성과 이용실태’). 이와 때를 같이하여 궁방이나 아문 같은 권력기관들도 자신들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갯벌을 간척하는 데에 뛰어 들었다. 가령, 1820년대에 용동궁이 부안 서도면에 방조제를 막아 ’삼간평‘이라는 들녘을 조성했다. 들녘 규모는 최대 200섬지기로써, 그곳에 세 개의 마을이 새로이 들어섰다. 부안에는 간척한 곳이 이 외에도 더 있어 ’원논‘, ’언독‘, ’배논‘ 등 간척 관련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양선아, ‘19세기 궁방의 간척’). 임진왜란이 끝난 후 침략군으로 들어온 왜군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잔류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또한 17세기 전반에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자 그곳 사람들이 대거 조선으로 망명해 들어왔다. 청나라가 중국을 완전히 차지하자 명나라 사람들은 배를 타고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이들을 모두 향화인(向化人)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정부의 정착정책에 의해 고창.영광.영암.해남 등 전라도 바닷가에 터를 잡았다(김덕진, ‘전쟁과 전라도 지역사’). 이들은 바닷가에서 어로 생활을 하면서 갯벌을 막아 토지세 면세 혜택이 있는 간척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망명자의 정착지를 주인 없는 갯벌에 정해준 꼴이다. 이런 정책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6.25 전쟁 이후 정착한 월남인들이 간척지를 개간한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전쟁 때 황해도 피란민들이 군 수송함을 타고 서해안을 따라 목포로 이동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장흥군 대덕에 터를 잡은 후 ‘난민정착사업’이라는 정부 정책의 지원 아래 대규모 간척지 공사를 추진했다. 그들은 현지인들과 함께 ‘흥업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넓은 간척지를 만들어 분배까지 완료했다. 준공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했고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김아람, ‘한국전쟁기 황해도민의 서해안 피난과 전후 전라남도 정착’).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덕진의 역사속 생업
조선시대 도별 농지 규모  (단위:결, 자료:조선토지지세제도조사보고서)
 1404년1454년1591년1646년1719년1769년1807년1893년1901년
경기도14만14220만711914만1970 2만183910만1256 5만1007 5만2107 4만1446 6만8249
충청도22만309023만630025만250312만462525만520812만386112만83310만270013만3146
전라도③17만3990③27만7388①44만2189①20만437①37만7159②19만9220①20만4740①20만2320①25만1684
경상도23만462930만114731만502618만957433만677819만952720만153318만669921만8501
황해도 9만92210만477210만6832 4만423812만8834 6만9824 6만8289 7만6130 8만7258
평안도 664830만875115만3009 4만7561 9만804 8만3507 8만4902 8만603010만4636
강원도 5만9989 6만5916 3만4831 8256 4만4051 1만1408 1만1569 1만402 2만255
함경도 327113만413 6만3831 4만6806 6만1243 6만2489 6만6545 5만236010만1382
(전라도의 농토 면적이 15세기에는 전국 3위였으나 16세기부터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나갔다)
boh@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