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의 울림은 쌀의 울림… 생명의 주파수와 교감
이팝, 신의 꽃-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고창 농악보존회 공연
세 가택신, 우리네 이야기
극.농악으로 풀어낸 작품
2018년 07월 05일(목) 21:00
이팝 신의 꽃 공연 중 모내기와 이팝꽃을 연출한 장면. 필자 제공
물패가 한바탕 어우러지더니 각각의 탈을 쓴 세 사람이 나온다. 가만 보아하니 사람이 아니다. 성주신, 조왕신, 철륭신들이다. 집이라는 공간을 관할하고 관리하는 신격들이다. 서로 상좌다툼을 한다. 수궁가의 날짐승들과 길짐승들만 상좌다툼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대들보요 조상신격이니 성주가 제일이라 우긴다. 집을 지어도 성주 올린다 하고 가택을 싸잡아 말할 때도 성주라 한다. 안동의 솔씨를 받아 키워 내고 그 육중한 대들보며 서까래를 올리니 나무가 제일 아닌가? 사설을 들으니 대체 그럴 만하다. 이내 부엌의 불을 담당하는 조왕신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다. 물과 불이 없으면 사람이 어찌 살아가리. 부뚜막에 떠놓은 정화수는 생산의 신 삼신할머니에게로 이르거니와 솥단지 물동이 없이 어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그것 또한 그럴 만하다. 철륭신이 가만있지 않고 나선다. 장독대를 관장하는 신격이다. 새벽녘이면 할머니가 나와 정화수 떠놓고 빌던 자리다. 터의 신 터줏대감이 언저리에서 지켜보신다. 간장, 된장이며 질그릇들의 기초를 관장하니 이것이야말로 상좌 아닌가. 가만히 들으니 그 또한 그럴 만하다. 대체 누가 상좌란 말인가?

사람들이 떠난 자리, 가택신들의 상좌다툼 고창농악보존회가 지난달부터 마련한 ‘신의 꽃, 이팝’이란 공연에 나오는 첫 풍경이다. 빈 집을 소재 삼아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 하지만 차마 집을 떠나지 못하는 가택신들의 하소연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어우러질 무렵, 객석으로부터 한 늙은이가 등장한다. 집 주인 점례다. 몇 가지 정보들이 제공된다. 그러고 보니 가택신들의 상좌다툼이 주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 차례의 풍물패들이 돌아나는 길에 점례와 점순이는 아이가 되었다가 소녀가 되었다가 이내 늙은이로 돌아온다. 때때로 점순이의 보이지 않는 몸과 점례의 늙은 몸들이 소녀로 화하고 아이로 되돌아간다. 씨줄 날줄이 엮이고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된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상좌가 누군지 알아차린다. 사실은 이 집 주인 점례였음을. 아니지, 점례가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언니 점순이였음을. 전체적인 스토리는 매우 깔끔하다. 애써 무언가를 설명하려하기보다 조명의 긴 터널 혹은 울리는 꽹과리와 가죽악기들의 행간 아래 내버려둔다. 농악이란 이름의 리듬들이 맞추어내는 주파수는 아마도 생사의 공간들을 넘나드는 모양이다. 가락들, 리듬들이 어우러지고 멈추는 자리마다 차마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흥건하다. 내게 덧씌워진 암영의 셰도우 롤이 아니었으면 숨겨둔 이야기 상상에 젖어 내린 눈두덩이를 놀란 경주마처럼 들키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농악, 이팝의 직유(直喩) 쌀밥의 제유(提喩)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박강의의 변이다. “판타지 감성농악을 표방하는 ‘이팝: 신의 꽃’은 언니 점순이를 그리워하는 점례와 점순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가택신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역사 속, 잊혀가는 수많은 사연과 눈물 그리고 자연만물과 교섭하며 살아온 우리네 신명에 관한 이야기를 극과 농악, 음악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라” 했다. 왜 이팝일까 궁금하던 것이 이내 풀렸다. 이팝은 쌀밥의 다른 이름이다. 무슨 뜻인가? 농악의 여러 기원설들 중, 쌀밥 농사와 관련된 음악이라는 점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 이름을 이팝이라 했던 것은 그 꽃이 마치 쌀밥알갱이와도 같아서였다고들 한다.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꽃이 만개한 모양을 따서 이름 붙였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그래서일까.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는 “제사 덕에 이팝”이라 했다. 무슨 일을 빙자하여 이득을 얻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밥이든 쌀이든 비유의 궁극은 식량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다. 이팝의 꽃들은 그 생긴 모양새를 따라 쌀밥으로 직유(直喩)되었으나 농악은 쌀밥의 제유(提喩)라 할 수 있다. 쌀이 곧 식량의 총화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농악의 울림은 쌀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신의 꽃이라 이름 지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해마다 모내기철이 되면 남도는 이팝꽃 천지가 된다. 이 꽃들은 쌀밥으로 직유되고 식량으로 제유되며 궁극에는 목숨의 은유에 다다른다.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얘기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한 비유법들의 나열이 아니라 실제 벼를 포함한 식물들이 사실은 음악을 듣고 자라며 어떤 음악들은 병충해를 막기도 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꽹과리를 울리면 벼멸구의 ‘배아지’가 터질까?이완주 박사팀이 주장하는 그린음악 농법에 의하면 식물에 음악을 들려주면 생육환경이 개선되거나 훨씬 좋아지며 병해충을 예방한다고 한다. 여러 실험을 거쳐 데이터로 증명을 하고 있으니 허풍이 아니다. ‘그린 음악에 의한 작물 생산성 증대’란 글이나 단행본 ‘생태농업을 위한 길잡이’에서는 각 작물들의 성장률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식물이 선호하는 음악은 대개 1,000~ 2,000Hz 음역대의 소리라 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등은 물론이고 날짐승과 들짐승들의 소리도 포함된다. 현재 온실 농업에서 가축 사육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음악요법은 상식적인 방식이 되었다. 물론 실험에 사용된 음악들이 주로 서양음악 일색이고 클래식 중심이어서 한계는 있다. 오늘 화두 삼는 농악을 중심으로 한 들노래 풍장굿 등의 기능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남도의 어르신들이 흔히 하는 얘기들이 있다. 벼멸구는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두드리는 북장고 소리를 들으면 배아지가 터진다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가? 그렇다. 고추농사의 총채벌레 박멸 등 몇 가지 증거들이 있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이 음악은 음양의 교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각양의 들노래 중에서 특히 모뜨기나 모내기 노래에 성적인 사설들이 많다는 점을 들어 이를 주장하기도 한다. 성적인 사설이라고? 고대시기 중요한 농사의례 중의 하나였던 나경(裸耕)이 그 증거다. 보름달이 뜨면 주인 남정이 발가벗고 쟁기로 밭을 가는 의식이다. 구체적인 해석은 뒤로 미루지만 모두 음양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을 은유한 의례들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시작할 때 노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가 밭 가운데서 교합을 하기도 한다.

이팝의 서정에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서사까지이들 음악의 적용이 식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집안을 돌아 축귀(逐鬼)하고 마을을 돌아 지신을 밟는 동인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식물로 비유하면 마치 병해충에 해당하는 것들의 퇴치요 유익한 식물들에 대한 성장 호르몬제 같은 역할임을 알 수 있다. 동학의 전면에서, 노동투쟁의 전면에서, 전쟁의 전면에서 북과 꽹과리를 울려 에너지를 모으는 풍경들 또한 상상해 보라. 농악은 서정으로만 풀어낼 수 없는 에너지가 가득 들어 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용호상박의 땅뺏기 놀이 등이 그 사례다.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의 용기(龍旗)를 소재삼은 이야기였다. 마을 대항 땅뺏기놀이의 격렬한 전투 풍경은 석전(石戰)놀이, 이른바 돌싸움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북지역 논농사문화권에도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놀이다. 농기싸움 혹은 기싸움이라 한다. 강진지역에서는 실제로 촌답을 내놓고 내기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격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렇기 때문에 땅뺏기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농기(農旗)는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부여가 되었다. 하도낙서의 낙서(洛書)가 중복되어 그려졌다든지 신농씨, 등용문의 잉어나 거북이가 주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들 농기나 용기 혹은 땅뺏기 싸움놀이의 매개가 농악임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근본을 풀어헤치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농악은 이팝의 서정과 용호상박의 서사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쌀농사의 노래와 땅뺏기의 역사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생명의 주파수와 교감하는 혹은 생사의 전이지대를 넘나드는 신의 음악들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쌀밥의 음악을 넘어 ‘농악극’이 가야할 길 근래 들어 부쩍 이런 시도들이 늘었다. 사물놀이가 농악에서 비롯된 것이야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니 덧붙여야 쓸모없다. 농악이란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강요된 말이니 쓰지 말자는 주장도 크게 쓸모없다. 보성의 선비 남파 안유신(1580~1657)이 남긴 기록에 이미 ‘농악’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증거들이 많다. 물론 대용어로 등장했던 ‘풍물’이란 용어의 진정성도 중요하다. 본디의 일이 이러하니 사안과 격에 맞춰 합당한 이름을 쓰면 될 일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들 음악을 어떤 철학으로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가이다. ‘이팝: 신의꽃’을 보아하니 성주신, 조왕신, 철륭신들을 등장시켜 삶의 ‘정주터’를 문제 삼고 있더라. 좋은 시도다. 정주의 터가 사실은 몸이라는 공간의 확장임을 주지한다면 이 터를 울리는 음악은 곧 몸을 울리는 음악이기에 그렇다. 지난 몇 번의 칼럼에서 나는 이 울림을 공명(共鳴)으로 풀어낸 바 있다. ‘정주터’로부터 나라와 세계로 확산되는 공간의 공명이요 선대로부터 후대로 이어지는 시대의 공명 말이다. 사람들만의 공명이 아니요 자연과 합일하는 천지조화의 공명이다. 더불어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삶과 죽음의 전이지대를 넘나드는 음파요 이를 철학으로 구축한 것이 농악이라는 이름의 음악임을 재삼 강조해둔다. 근대기에 일어난 기교와 기량은 이들 근본을 말한 후에야 비로소 언급의 가치가 있을 뿐이다. 요즈음은 창극, 노래극, 뮤지컬 등 여러 이름의 장르들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상기 근본을 중시한다면 어떤 수사를 동원하여 이름을 붙이건 간에 ‘농악극’으로 범칭(凡稱)하는 것이 맞다. 제아무리 기량이 뛰어나고 기능이 좋아도 근본을 놓치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남도인문학 TIP 일제강점기 그림자… 은닉된 신파성

서정(敍情) 속에 은닉된 신파(新派)에 대하여울음을 삼키는 구조를 흔히 신파성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국악이란 이름으로 호명되는 각양의 장르들에서 산견된다. 주지하듯이 신파는 신파극의 줄임말로 1910년대에서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에서 이뤄지던 연극 형태를 말한다.

일제 강점기이니 당연히 일본 신파극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울고 탄식하는 방식의 서사 짜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말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일세기를 관통하는 그림자들일 뿐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언설대로라면 한반도 미학의 정체는 한(恨)이다. 나 또한 이 발신을 받아 오랫동안 한의 한국을 말해왔다. 정녕 그러한가? 야나기를 비판하는 여러 논설들이 있었다. 그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존재하는 그림자조차 숨기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난 시대의 그림자는 그림자대로 인정하되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을 갖는 것이 옳다. 신파를 무기삼아 역사를 해독해 온 방식들은 거부해야 한다. 역사는 당대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려 작은 것을 큰 것처럼 부풀리거나 옹졸한 것을 대범한 것처럼 이르는 것도 그 의도의 선의를 떠나 비판의 대상이다. 자격지심의 발로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팝: 신의 꽃’을 보니 은닉된 신파성들이 보이기에 몇 마디 보탰다. 이후 시도될 농악극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신파의 시대는 우리 세대로 끝내야 한다. 다음 세대는 울고 짜지 말고, 꽹과리 울리고 북장고 두드려 펄쩍펄쩍 춤추며 천지합일의 철학을 만방에 퍼뜨리게 해야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 이사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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