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고위층들 취향 고스란히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타임머신
한성욱의 도자 이야기 선조들의 불행이 남긴 해저 유적
1975년 신안 증도 어선 그물에 중국자기 올라와 관심 집중
이후 40여년 해역 300여곳 탐사
난파선 14척에서 12만점 쏟아져
2017년 12월 15일(금) 00:00
무안 도리포 해저 유적 도자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바닷길을 통한 문화적 접촉이 활발했다. 다양한 해상활동은 바다 속에 많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하나가 재난으로 순식간에 많은 사연을 안고 침몰한 무수한 난파선들이다. 침몰 당시를 그대로 간직한 난파선은 생생한 역사적 현장으로 우리를 과거로 연결하여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바다는 육지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개발과 파괴가 적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남아 당시의 많은 유물과 선상 생활 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해저유적에 대한 관심과 발전의 계기는 1975년 8월 신안 증도 앞바다의 유물에서 비롯된다. 당시 이 곳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의 그물에 중국 자기가 건져 올려지고 1976년부터 1984년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많은 유물이 출수된 것이다.

이후 40여 년 동안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300여 곳의 유물 매장해역을 탐사했다. 22곳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14척의 난파선을 조사하고 12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을 수습했다.

이 유물의 대부분 도자기로 도자사 연구와 전시, 교육 등에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여 많은 학술적 기여를 하였다.

해저에서 출수된 도자기는 같은 시기의 다양한 그릇이 대량으로 출수되고 있으며, 생산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함께 출수되는 목간 등을 통해 생산과 유통 시기, 수요층 등을 파악할 수 있어 청자의 시대적 변화뿐만 아니라 생산과 유통, 소비 등 경제 구조를 연구하는데 필수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바다 속 난파선의 도자기는 그 시대 사람들의 도자기 취향과 식생활, 경제와 문화상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다양한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군산 비안도 해저에서 발견된 난파선에서는 구운 상태 그대로인 청자와 실패한 청자를 선별하지 않고 함께 선적하고 있어 당시에도 입도선매(立稻先賣)의 상품경제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출수 유물 가운데 도자기가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것은 바닷길이 도자 운반에 적극 이용된 측면도 있으나 형태가 온전하고 무기물로 조성되어 있는 특성도 큰 역할을 하였다. 즉, 다른 유물은 유기물이 대부분으로 바닷물에 의해 유실되거나 시간의 경과로 부식되는 성질을 주로 지니고 있어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를 운송하는 중요한 교통 수단으로 바닷길이 널리 이용된 것은 항해술과 조선 기술이 발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바닷길은 충격에 약한 도자기의 특성으로 인해 풍랑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량을 육로보다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어 더욱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바닷길은 자기 이외의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고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주요한 통로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와 문화 발전 등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바닷길은 새로운 물품의 전래와 기술의 전파, 그리고 이를 통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통로로 청자의 발생도 그 중에 하나이다.

바다를 통한 도자기의 운반은 고려청자의 기술이 강진으로 집약되고 사회가 안정되는 고려 중ㆍ후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는 대체로 고려청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전성기 비색청자를 생산하는 시기로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층도 확대되었기에 바다를 이용한 청자의 운반 수량도 증가되었다.

따라서 해저유적도 대부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고려 초기에는 개성 주변의 경기지역 등 다양한 지역에서 청자를 생산하여 자체적으로 수요를 충당하였기 때문에 청자를 대량으로 운반할 필요성이 없었다. 또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로에 의한 조운을 중단하고 육로를 통한 조운을 실시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초기 청자가 확인되는 곳은 보령 삽시도 해저유적 한 곳뿐이다. 말기 청자는 무안 도리포 해저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도리포는 대량운반과 시간단축의 이점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해로를 이용한 예외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경우 초기는 도자기를 지방으로부터 공납받아 사용하였으나 경기도 광주에 왕실과 중앙 관사가 필요로 하는 백자를 생산하는 사옹원(司饔院) 분원이 설치되면서 지방에서 한양으로 도자를 운반할 필요성이 없었다.

해저 출수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려청자는 많은 수량을 한꺼번에 운반하며 부피가 크고 무거워 바닷길을 통해 유통된 결과이다. 특히, 고려는 산이 많고 여름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자연 지리적 특성으로 세곡과 같이 부피가 크고 무거운 화물의 운반은 국가의 공식적인 운송수단인 바닷길을 통한 조운로를 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고려 청자의 운반도 편리한 조운로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이송하였는데, 서해안에서 발견되는 200여개소의 해저유적이 세곡 운반에 이용되었던 조운로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해안을 끼고 있어 조운로를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강진 청자는 해저유적에서 확인되는 선박의 크기로 보아 생산지였던 대구면 사당리의 미산포구에서 선적되어 서해안의 연안항로를 따라 개경으로 입항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강진을 출발한 청자 운반선은 대부분 개경이 목적지였지만 일부는 조정의 통제 아래 지방의 거점 포구로 운송되어 지방 관아와 대찰, 최상류층의 수요에 부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대부분 육안으로 해안을 확인하면서 항해하는 근접항로를 채택하였으나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런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충청도 안흥량(安興梁)이 있는 태안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운하 굴착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는 태안과 군산을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 해저유적이 집중적으로 조사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펄이 없으며 파도가 높아 해저유적의 확인이 어렵지만 서해안은 이와 반대의 원인을 갖추고 있어 많은 난파선이 확인되는 요인이다. 그리고 최근 조사된 태안 대섬 해저유적에서 운반 책임자의 서명으로 판단되는 '정(鄭)'이 쓰여진 목간이 출수되어 지역 향리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정씨는 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던 탐진현(현재 강진군)의 토착 성씨 가운데 하나로 이들에 의해 청자 운반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저유적은 선조들에게는 생명까지 앗아간 매우 불행한 조난의 현장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소중한 문화자산을 남겨주어 역사와 문화 예술을 살찌우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해저유적에 담겨 있는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고 여기에 담긴 문화유산이 우리 국민과 인류 전체의 공동 유산이라는 인식을 갖고 이를 잘 보존하여 미래에 물려주어야 하겠다.



한성욱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