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고 거친 해남 청자에 끌린 고려 중간계층들
해남, 또 다른 고려 청자의 멋을 만들다
철화 무늬 중앙 아닌 대부분 지방에서 사용
산이ㆍ화원면 일대 해안선따라 가마터 분포
좋은 점토 곳곳에 있어 원료 수급에 유리
2017년 09월 22일(금) 00:00
해남 신덕리 청자요지에서 출토된 도자.
해남은 이웃 강진과 함께 고려 청자의 역사를 가꾸고 발전시킨 매우 중요한 곳으로 남도 도자문화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성을 알리는데 큰 역할하고 있다.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해남은 기후가 따뜻하고 토양이 기름지며, 넓고 긴 해안선을 갖고 있어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청자 가마터는 산이면과 화원면 일대 해안선을 따라 집중 분포하고 있는데, 남해안과 영산강을 끼고 있어 제주와 완도, 진도 등 인근 도서 지역은 물론 중국, 일본 등과 연결되는 대외 교역의 요충지로 도자 기술의 유입과 공급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다. 이러한 대외 교류의 유리한 입지 조건은 군곡리 패총(사적 제449호)과 만의총 고분, 이웃한 완도 청해진과 진도 벽파진 등의 해상 활동, 일본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해남유형의 청자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선사가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도 음다(飮茶)와 밀접한 관련에 있는 청자와의 인연을 보여준다.

고려 중기까지 해남유형의 조질 청자를 대규모로 생산하였던 산이면과 화원면 지역은 도강군(道康郡) 아래의 황원군(黃原郡) 소속이었으나 1018년(현종 9) 영암군으로 이속됐다. 영암군은 940년(태조 23) 양질 청자 생산의 중심인 대구소(大口所)와 칠량소(七良所)가 있던 탐진현(耽津縣)을 예속시키고 있어 1124년(인종 2) 속현이던 정안현(定安縣)이 탐진현을 장흥부(長興府)로 독립하기 이전까지 고려시대 청자 산업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해남의 청자 가마터는 1983년 산이면 진산리(사적 제310호) 일대에서 100여기의 가마가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1998년 화원면 신덕리(전라남도 기념물 제220호) 일대에서 초기 청자요지 60여기가 추가로 확인되어 청자의 탄생과 함께 이를 대규모로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남부지역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화원면 신덕리 일대 청자요지는 해남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화원반도의 중심에 있다. 진산리 가마터와는 금호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가마터 주변은 신덕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방이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가마 운영에 필수적인 땔감과 물을 공급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마는 신덕저수지 일대와 뱀골마을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하고 있다. 최근 발굴 조사를 실시한 신덕리 20호 가마터는 고려 초기 남부지역의 특징인 진흙 가마의 구조가 완벽하게 밝혀져 청자요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즉, 가마의 길이가 10m로 소규모이며 화구부(火口部) 앞에 작업 공간이 없어 영암 구림리 등 전통 도기 가마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청자와 흑자, 도기 등의 도자기와 갑발과 도지미 등이 확인됐다.

청자는 차를 마실 때 쓰였던 다완을 비롯하여 발과 접시, 병, 호, 등 일상 생활용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흑자와 도기는 저장 또는 운반 용기로 사용하였던 병과 호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청자의 품질은 완을 제외하면 대부분 조질이다. 완은 다른 그릇에 비해 특별히 제작하여 태토와 유약 등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며, 다른 그릇들은 포개구이를 한 사례가 많은데 비해 완은 1점씩 갑발에 넣고 갑번(匣燔)하고 있다. 흑자와 도기는 중부지역의 벽돌 가마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남부지역의 진흙 가마에서만 파악되는 것으로 가마 구조와 함께 생산품도 영암 구림리 등의 전통 도기 가마의 제작 기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신덕리 가마는 대체로 11세기를 중심으로 운영된 후 이후 이웃 진산리로 이동하여 조질청자 생산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운영 시기가 짧은 것은 일시에 많은 가마가 운영되어 주변의 땔감과 태토가 고갈되어 나타난 결과로 추정된다.

산이면 진산리 일대의 청자 가마터는 해남만 중앙의 가늘고 길게 뻗은 산이반도에 위치하는데, 특히 영산강 개발에 의해 간척이 이루어진 초송리 남쪽 해안에서 진산리 해안에 이르는 6㎞ 해안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높은 산이 없는 낮은 구릉지대로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삼림이 풍부하고 바다와 인접하여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질 좋은 점토가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노출돼 있어 원료 수급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84년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해저유적에서 출수된 많은 양의 청자가 이곳에서 생산된 것으로 밝혀져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91년 진산리 17호 청자요지를 발굴조사하여 길이 24.5m, 벽체 너비 120~130㎝, 바닥 너비 100~120㎝의 가마터를 확인했다. 가마터는 신덕리에 비해 크고 40m 길이의 중국식 벽돌 가마보다 작아 전통과 중국식을 절충한 크기로 진산리 가마가 고려 중기에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가마 바닥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조질청자 생산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청자와 흑자, 도기, 갑발, 도지미 등이다. 기종은 대접과 완, 접시, 병, 자배기, 대반, 뚜껑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청자는 순청자와 철채청자, 철화청자, 음각청자, 양각청자, 투각청자, 상형청자, 퇴화청자, 박지청자, 흑갈유청자 등 다양하다. 진산리 생산품 가운데 다완과 철화 무늬가 있는 청자는 신덕리처럼 다른 그릇과 달리 특별히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남지역의 가마터는 역사적ㆍ미술사적 의의와 함께 규모면에서도 강진 청자요지(사적 제68호)와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강진의 청자 가마는 고려 500여년간 200여기가 운영되었으나 해남은 고려 중기까지 300여년간 200여기가 짧은 기간에 대규모로 운영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초기 청자요지가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곳은 신덕리가 유일한 지역이다. 해남유형의 청자는 중앙과 최상류층보다는 지방과 중간 계층을 위해 주로 생산된 것으로 투박하지만 거친 맛이 있다. 철화 무늬는 단순하면서 간략한 멋을 지니고 있어 해남만의 전통을 엿 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

한성욱의 도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