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덤 주인은 4~5세기 거대 권력자
즐비한 고분 마한 핵심지역
영산강 유역 대표하는 독무덤
철기류ㆍ토기류ㆍ옥제품 출토
4~5세기 일본에 건너간
2016년 11월 10일(목) 00:00
영암 내동리 쌍무덤은 원래 4기였으나, 주민들이 가족묘를 조성해 현재는 3기만 남았다. 가장 큰 1호분은 길이 56m, 높이 5~6m의 거대한 타원형 봉분으로 이 일대 유력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김양배 기자

영암에는 40개 지역에 모두 150여기의 옹관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는 영암지역이 영산강 유역 마한의 핵심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옹관고분(독무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이 내동리 쌍무덤(전남도 기념물 83호)이다. 쌍무덤은 성틀봉 구릉 끝자락에 위치하며, 시종면 소재지에서 와우리로 가는 삼거리 좌측에 있다. 내동리 쌍무덤을 마을 주민들은 매화 향내가 사방에 퍼지듯 명성과 인망이 높은 자손들이 태어난다는 '매화낙지형'의 명당이라고도 부른다.

이 고분군은 원래 4기였다. 4호분은 주민들이 가족묘를 조성하여 훼손되고,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남쪽의 1호분과 2호분은 거의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1호분은 길이 56m, 높이 5~8m의 거대한 타원형 봉분으로,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독무덤 중 하나다. 북쪽에 약간 낮은 평탄부가 있어 장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2호분은 원형으로, 1ㆍ2호분이 마치 붙어있는 쌍둥이 모습이어서 쌍무덤이라 불린다. 3호분은 1호분과 인접해 있는데 1ㆍ2호분에 비해 규모가 작다. 길이가 56m에 이를 정도 웅장한 규모라서 이 일대가 마한 중기 거대한 정치권력체의 주거지로 추정되고 있다.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쌍무덤의 성격과 구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도굴된 봉분은 남북으로 약간 긴 타원형이며, 고분 정상부가 약간 내려앉아 있다. 흩어져 있는 옹관조각들과 인근 초분골 무덤의 대형 옹관의 존재로 볼 때, 4~5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쌍무덤의 주인공도 마한의 유력 지배자로 보인다.

영암지역에 분포한 고분의 중심은 시종면이다. 그 중심은 신연리, 옥야리, 내동리 고분군으로 여기에만 100여기가 밀집되어 있다. 시종면은 인근 나주시와 경계지역으로 금동관이 출토된 반남고분군과 인접지역이다. 따라서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지역이 마한 전성기 시절 정치권력체의 중심지였다.

전남 문화재자료 제 139호인 신연리 고분군은 15기의 고분이 무리지어 있다. 고분의 규모는 길이 10~19m, 높이 1.5~2m 정도이다. 형태는 둥그런 모양에 가까운 타원형과 원형이 많고 네모반듯한 장방형도 있다.

이 고분군 중 제 9호분이 1991년 국립 광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됐다. 조사 결과 사각형의 무덤 가장자리에서 도랑을 파고 그 흙으로 무덤을 만들었음이 확인됐다. 그리고 무덤 안에는 4기의 옹관과 3기의 덧널이 함께 있었다. 4기의 옹관 중에는 영산강 유역 특유의 형식인 U자형 전용 옹관도 있었다.

무덤에서는 쇠 투겁창 등의 철기류와 긴목항아리로 대표되는 토기류, 그리고 대롱옥, 곱은옥, 유리옥 등의 옥 제품이 출토되었다.

전남 문화재자료 제 140호인 옥야리 고분군은 상촌에 19기, 신산에 5기, 서촌에 1기, 장동에 3기 등 총 28기가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밀집해 있다. 대부분은 둥근 모양의 원형이거나 사각형의 방형이다. 장동마을 뒷산에는 크기가 거대해 마을 사람들이 '동산'이라 부르는 사각형의 방대형 고분이 축조돼 있다.

고분이 위치한 지역은 지네라고 부르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 둘러져 있는데, 토성과 고분군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밝혀진 사실은 없다.

고분이 파괴되거나 도굴돼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4호분 주변에서 영산강 유역 특유의 U자형 옹관이 수습되어 고분의 성격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14호분은 흙을 파고 하나의 옹관을 안치한 후, 봉토를 쌓은 단독장으로 소형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암 시종면의 옥야리, 신연리 고분군은 인근의 나주 신촌리 고분군 등과 함께 고대 영산강유역 마한의 실체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영암지역의 마한사와 연관지어 왕인 박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왕인박사는 백제사람으로 규정돼 있었다. 고대 영산강 유역의 많은 인물이 일본에 직접 건너가서 선진문물을 전했다. 마한인 영암 구림 출신의 왕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일본의 역사서에 의하면 왕인은 일본 왕의 요청을 받고 제철기술자ㆍ직조공ㆍ양조기술자 등과 함께 '논어'10권과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왜왕 응신(應神)의 태자 우치노와 키이로츠코의 스승이 됐으며, 신하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다.

왕인이 언제 일본에 건너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근초고왕 대에서 아신왕 대, 즉 4세기 말 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인의 도일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사서에 왕인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 문화의 꽃을 피운 왕인은 지금까지 알려진바와 달리 백제인이 아니라 마한인이라고 봐야 한다. 적어도 5세기말까지 영암지역에는 마한의 권력체가 존재했으며, 이를 증명하는게 영암지역의 마한 옹관고분들이다.영암군에서는 마한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ㆍ연구에 착수한 상태로 향후 고고학적, 역사문헌 발굴 등을 통해 이런 가설을 검증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한역사교재를 집필한 신봉수씨(광주 제일고 역사교사)는 "마한 중심축은 영암을 거쳐 나주로 북상하는데, 양지역의 근접성을 볼 때 영암과 나주는 같은 유적으로 봐도 무방하다"면서 "지금은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그 때는 영산강 물길과 들을 따라 동일지역에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건상 선임기자 gs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