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맞선 상인단체… 목포, 전국 네번째 설립
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4> 호남권 상공(商工)의 역사
개항 이후 일본 상인 증가하자
민족계 상인들 위기 의식
호남권 근대 상공회의소 시초
1898년 목포상객주회 설립
1907년 군산 조선상객주회 이어
익산ㆍ전주ㆍ광주ㆍ순천ㆍ여수 順
모두 일제시대때 단체 발족
2015년 08월 10일(월) 00:00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본관 돌담벽 표지석에는 전국 상공회의소 설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 원안은 목포 표지석.
서울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본관 돌담벽에는 설립연도가 새겨진 표지석들이 두 줄로 길게 붙어있다. 설립 순으로 조성된 전국상공회의소 표지석들이다. 그 중에 눈을 의심케 하는 표지석이 띈다. 74개의 표지석 가운데 앞에서 두번째에 '목포'라는 표지석이 위치해 있다. '서울'ㆍ'인천' 다음에 '부산'ㆍ'목포'라는 표지석이 붙어있는 것이다.

다른 세 곳의 현재 경제력과 비교할 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표지석에 새겨진 내용은 사실이다. 목포는 분명 전국에서 네번째로 상공회의소가 탄생한 곳이다. 이 표지석은 호남의 상공역사(商工歷史)의 출발이 국내 어느 곳에 비해도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개발소외의 영향으로 경제적 낙후지역으로 전락됐던 호남의 서글픈 역사적 징표이기도 하다. 목포를 시작으로 호남에는 일제시대에 이미 군산ㆍ익산ㆍ전주ㆍ광주ㆍ순천ㆍ여수에 오늘날과 같은 상공회의소의 전신들이 들어선다.

우리나라의 식량기지로, 개항(開港)과 함께 상공에 대해 일찍 눈을 떴던 호남권 상공의 역사를 '상공회의소백년사'(1984년 대한상공회의소 발행)와 지역상공회의소 자료를 통해 알아본다.

>>>

우리나라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발로 불어닥친 개항의 여파와 함께 한다. 일본상인들이 개항지를 중심으로 상인조직을 만들어 상권을 장악해 나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민족계 상인들이 상인단체를 만들면서 시작된다.

가장 먼저 1982년 원산에 일본상인단체에 대항해 우리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원산상의소(元山商議所)'가 생기고 1884년에는 서울 운종가(運鐘街) 육의전(六矣廛) 상인들이 중심이 돼 '한성상업회의소(漢城商業會議所)'가, 1989년에는 '부산객주상업회의소(釜山客主商業會議所)'가 창설된다.

목포에 호남 최초의 민족계 상인단체가 생긴 것도 개항시기와 맞물려 있다. 부산ㆍ인천ㆍ원산에 이어 1897년 10월1일 진남포와 함께 개항된 목포는 곡물과 수산물의 집산지로 개항 이전 이미 일본상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개항이 되면서 일본상인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일본상인들은 수출무역품을 중심으로 한 '목포상설회(木浦商話會)', 수입무역상으로 조직된 '잡화상조합(雜貨商組合)' 등을 조직, 조선상인과 경합했다. 객주(客主)와 여각(旅閣ㆍ연안 포구에서 상인들의 숙박, 화물의 보관, 위탁 판매, 운송 따위를 맡아보던 상업 시설)업에 종사하던 민족계상인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다. 이들은 목포항 개항 다음해인 1898년 '목포상객주회(木浦商客主會)'를 조직, 본격적으로 일본상인단체와 맞섰다. 이렇게 설립된 목포상객주회(이후 '목포사상회ㆍ木浦士商會'로 개칭)가 목포뿐만 아니라 호남권 최초의 근대적 상공회의소의 시초가 됐다.

목포상객주회는 조선상인의 단결을 위해 자주 모임을 갖고 상업정보를 교환했으며, 상거래에 있어서 일본상인과의 분규를 조정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목포상객주회는 특히 민족계 상인들이 1908년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 민족자본을 모아 호남선을 건설하려고 했을 때 자금을 모집하는데 적극 협력했다.

전라도에서 두번째 민족계 상인단체가 탄생한 곳은 군산이다. 1899년 개항한 군산은 일본인 미곡수출업자들이 다수 진출했다. 이들은 1907년 군산에 '일본인상업회의소'를 설립한다. 이에 대항해 같은 해 5월 민족계 상인단체인 '조선상객주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산에서 상인조직이 늦은 이유는 미곡을 제외하고 는 기타 상거래가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국 주요도시에서 상인단체가 설립돼가던 시기, 일제는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강점하면서 1915년에 '조선상업회의소령(朝鮮商業會議所令)'을 제정, 민족계 상업단체와 일본인 상업회의가 강제통합되도록 한다. 목포사상회가 한 해 뒤인 1916년 6월17일 일본인상업회의소와 통합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군산상객주회가 1916년 일본인과 함께 '군산상업회의소'를 설립한 것도 이 시기다.

이후 일제는 1930년에는 또다시 '조선상공회의소령(朝鮮商工會議所令)'을 제정, 민족계 상업회의소를 해산시키고 일본인 상업회의소에 흡수ㆍ합병되도록 강제했다.

이 시기에 호남지역에서 익산(1933년), 전주(1935), 광주(1936), 순천(1939년), 여수(1940년)상공회의소가 생겨나게 된다.

광주의 상공인단체는 광주읍(邑)이 부(府)로 승격된 1935년 이전까지 임의단체의 형태로 민족계 상인단체인 '광주실업청년구락부'와 일본인상인단체인 '광주상공회'가 서로 대치하며 상권경쟁을 벌였다. 특히 1913년부터 활동을 개시한 광주실업청년구락부는 창설 첫 사업으로 '광주상민(商民)운동회'를 개최했으며, 타블로이드 판 '상공뉴스(商工뉴스)'를 발행, 회원업체에 사업정보를 전달했다. 그후 1936년 12월22일 광주실업청년구락부와 광주상공회가 통합, '광주상공회의소'로 설립됐다.

전남 동부의 교통요충지이면서 농산물의 집산지로, 일찍부터 일본인의 내왕이 잦았던 순천에서는 1939년 3월 한ㆍ일 양측의 상인들이 공동으로 '순천상공회'를 설립했다. 또 1942년10월28일 뜻있는 상공인들과 순천상공회 회원들을 중심이 돼 '순천상공회의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여수는 1931년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수산업의 성황으로 일본, 대만 등과의 교역량도 크게 늘어났다.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일본상인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당시 여수의 거상이었던 김영준과 주요일본상인들이 주동이 되어 1940년 10월10일 '여수상공회의소'를 설립했다. 이처럼 현재의 광주ㆍ전남지역 상공회의소는 이미 일제시대때 설립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상공회의소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일제가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서두르면서 전시통제동원체제강화의 일환으로서 1944년 8월 '조선상공회의소령'을 '조선상공경제회령'으로 개편, 상공회의소 조직과 활동에 대한 통제와 개입을 크게 확대시켰다. 광주ㆍ전남지역 상공회의소가 모두 '전라남도상공경제회'에 승계되는 등 전국의 상공회의소가 도단위 상공경제회로 통합됐고, 각 시군단위 상공회의소는 지부형태로 전락했다.

해방과 함께 조선상공경제회는 해산되고 미군정당국에 의해 접수됐다. 현재와 같은 상공회의소법은 지난 1952년 12월 '상공회의소법'이 제정ㆍ공포되면서 시작됐다. 또 1966년에는 상공회의소법 개정법률이 공포돼 상공회의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정부의 감독권을 강화시켰다. 이 개정법률이 현재의 상공회의소의 모체가 됐다. 그러면서 각 지역상공회의소가 독립적인 단체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덕균 선임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