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日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 견 착
끝없이 가라 앉으면 마지막엔 어디에 이를까.
공장문을 닫고 경매에 넘어간 집도 비워주어야 할 때가 되자
가장 무겁게 맞닥뜨린 것은 시간이었다.
2009년 01월 01일(목) 00:00
<그림 한희원>
엽총을 꺼내야겠다. 길이 미끄러운데다 앞이 보이지 않아 차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털털털, 엔진의 공회전 소리만 들릴 뿐 움직이지도 못하는 차안에 있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남자는 차안에 놓여있던 엽총을 집어 든다. 차창너머로 휘날리는 눈송이들과 주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황제가 제 세상을 만난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목적지까지는 가지 못했어도 이런 날씨에 수향산 가까이에 당도한 것만도 다행이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길은 눈에 익다. 하늘은 아예 세상을 묻어버리려는 듯이 눈을 쏟아 붓는다. 바람소리가 칼바람처럼 들린다. 눈보라가 먼 산 등줄기를 하늘 속으로 뿌옇게 녹여놓으며 자욱이 허공에 떠 몰려온다. 눈을 떨구는 창공 저 너머에도 아내와 아이들이 쏟아지는 눈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지 않은 곳에 꿩 한 마리가 날아간다. 천지가 눈으로 뒤덮인 광경을 보고도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우울해진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귀속을 뒤흔들고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남자로서는 한 발 자국이라도 더 멀리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뿐이다. 이대로 푹 쉴 수만 있다면…. 산기슭 아래에는 개울물이 흐른다. 작게 조잘거리는 듯한 물소리가 남자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살얼음이 개울가 가장자리에 하얗게 붙어 있고 수면은 잔잔하게 흐른다.

황제의 입에서 연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온다.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고 황제가 짖기 시작한다. 형태도 소리도 다 덮어버린 설경 위에 황제의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황제는 색색의 날개와 꼬리를 휘저으며 공중을 날아가는 꿩을 본 것이다. 남자는 오른쪽 어깨에 엽총을 올려놓고 조준을 한다. 빗나간 모양이다. 매캐한 화약 냄새는 눈가루와 더불어 공중으로 퍼져나간다. 꿩은 눈발사이로 날아가 버리고 황제는 눈 쌓인 바닥에 나동그라져 잠깐 뒹굴더니 재빨리 남자의 곁으로 달려와 꼬리를 친다. 남자는 총을 거두어 어깨에 메고 수향산 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엽총이 남자의 등에서 절그덕거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마에 뺨에 눈송이가 내려와 앉는다. 어지럽게 춤추며 휩쓸려 내려와 앉는 눈송이들 속에 채권자들의 고함소리가 남자의 귀에 겹쳐진다.

"야 임마. 김 사장인지 뭔지 당장 내놔, 준다는 날짜도 지나가 버렸는데 어쩔 꺼요. 우리도 거래처에 지불해야하는데. 씨팔 나도 먹고 살아야지."

"…."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하고 무츠름하게 있는 남자에게 다그치는 고함소리가 한참 쏟아졌다. 수화기를 내려놓을 무렵이면 그들은, '어디 먼 곳으로 빼돌린 것 아닌가.' 하고 말꼬리에 칼을 달았다.

자동차 부품공장을 하고 있을 때만해도 경기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그것만 성실히 꾸려나갔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몇 년 전 달러폭등으로 남자의 공장에 하청을 주던 회사가 더 이상 원자재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회사는 곧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남자의 공장도 속수무책으로 생산이 멎고 말았다. 남자가 발 빠르게 업종을 바꿔 주차설비시설을 차렸을 때에는 그런 대로 순조로운 셈이었다. 그 무렵 시내에는 주차공간이 우선 턱없이 부족했고, 신축건물에는 건축법상 주차장을 갖추어야했다. 조금 규모가 있는 건물들에는 당연히 주차타워나 지하주차장 같은 주차설비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늘 기계를 다뤄왔던 것이 주차기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특허까지 따낼 수가 있었다. 공사며 사후관리까지 잘 해준다는 데에 정평이 나있었다.

몇 년간은 제대로 굴러갔다. 주문이 예상보다 활발했고 영업실적도 좋아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어찌된 셈인지 작년부터 자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문은 그대로였는데… 아니 더 많았으면 많았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남자의 일가친척은 물론 처가까지 자금을 얻어 쓰는 데도 원활히 돌아가지가 않았다. 어음을 겨우 막아놓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단기부채가 줄지어 돌아와 변제하기에 급급했다. 얼어붙은 사채시장에는 더 이상 기웃거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에는 앞으로만 남았으되 뒤로는 자꾸만 밑지는 사업이었다.

발자국소리에 놀랐는지 꿩 한 마리가 또 퍼드득 날아간다. 남자는 어깨에 총을 올려놓고 가늠쇠로 조준을 한다. 탕, 화약 냄새와 함께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남자의 목덜미와 뺨에 느껴진다. 명중이다. 황제가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면서 달려가 떨어지는 꿩을 입에 물고 다시 주인에게로 달려온다. 남자는 황제의 머리를 몇 차례 쓸어주고 목덜미를 어루만져준 다음 꿩을 받아든다. 곧 꿩의 목을 비틀어 남자의 허리벨트 구멍에 끼운다.

눈에 파묻혀 흔적이 없어진 길을 헤집으며 남자는 산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공중을 날아다니던 설편들이 두 눈 속으로 가열 차게 파고든다.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산길을 헤매는 것은 인파가 넘치는 도심에서 전주(錢主)를 찾아 헤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자는 수첩에 빼곡히 적힌 대학동창들 직장으로 차례로 찾아 다녀보기도 했다. 그저 근처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 같이했을 뿐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어쩌면 그 쪽에서도 남자의 방문에 대해 미리 알고서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아직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을 당시에 걸핏하면 월부 책이나 정수기 팜플릿을 들고 오는 동창들에게 그랬듯이.

끝없이 가라앉으면 마지막엔 어디에 이를까. 공장 문을 닫고 경매에 넘어간 집도 비워주어야 할 때가 되자 남자에게 가장 무겁게 맞닥뜨린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자의 몸은 관성을 따라 일어나 세수하고,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을 챙겨들고, 다녀올게 여보…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내도 아이들도 다 떠난 휑한 집구석에서 지불 정지된 어음쪼가리처럼 홀로 버려진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순간이었다. 거리로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지만 시간은 남자와 함께 나가지 않고 남자의 명치끝에 얹혀 있었다.

집, 사무실, 건물. 오랜 동안 남자가 손으로 일구어냈고 수없이 드나들던 남자의 공간들이 하릴없이 공중에 분해되어 버리자 그것들의 네 벽과 바닥, 천장에서 스멀스멀 냉기가 뿜어져 나와 남자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사무실 안에서 으스스 몸을 떨다가 햇살의 온기를 찾아 남자는 창가로 향했다. 사무실 한 구석에 줄지어 선 채 시들어가고 있는 화분들을 지나치고 남쪽 창가에 쭈뼛쭈뼛 다가섰을 때 고즈넉하게 남산에 파묻힌 골짜기 안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하늘과 함께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솔밭을 내다보자 남자는 불현듯 고향의 산이 생각났다. 산의 품안에서 봄이면 뻐꾸기 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산의 품이 갑자기 넓어졌다. 골들도 깊어졌다. 산은 한동안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뒷모습을 보이며 산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남자는 목청 돋우어 불렀다. 아버지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산 속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생각마저도 정적의 휑한 뱃속으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 남자는 맘속으로 아버지, 하고 또 불렀다. 들리지 않는 그 소리는 막막한 외로움으로 바뀌어 남자의 가슴 갈피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한달음에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총이 구석에서 검게 빛나고 있었다. 집도 건물도 다 넘어가고 하다못해 아이들 쓰던 피아노까지 다 빼앗겼지만 유일하게 남자가 깊이 숨겨 간직해오던 총이었다. 남자는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내려와 닦고 조이고 기름을 치고 총구를 들여다 본 후 차에 실었다. 새로 뽑았을 때 검은 색으로 반짝이던 차가 한때 집에서 회사로 거래처로 은행으로 잘도 남자를 싣고 다니더니 이젠 중고차시장에서 폐차비용도 쳐주지 않을 정도로 낡아버렸다. 남자는 현관문을 나섰다. 우체통은 텅 비어있었다.

어제 이맘때쯤 우체통에 꽂힌 편지 한 장을 보았다. 최고장이니 독촉장이 아닌 것이라서 더욱 눈에 잘 띄었다. 너덜너덜해진 수첩을 뒤져본 후, 맨 아래 줄에 이영길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남자는 흐려진 기억을 더듬었다. 영길이라… 남자가 아주 어렸을 적 몇 번 먼발치서 보았을 뿐 그저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나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다. 봉투를 뜯고 편지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남자는 한동안 아득해지다가 서서히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막 벗어난 느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뽕밭 근처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던 영길 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번 만나 뵈려 했으나 연락할 길이 없었고 가까스로 전화번호를 알았으나 아무도 받질 않아 사무실 주소를 수소문하였고 거기서 집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은 대치동에 살고 있습니다. 일간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연락 주십시오. 이영길."

딱히 갈 곳도 없이 나선 발걸음이었다. 남자는 편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길을 나섰다. 어쩌면 마지막 희망을 걸어본 걸음이었는지도…. 전철을 타고 간 영길의 사무실은 대치동의 꽤 값나간다는 그의 아파트 단지와 가까웠다. 번듯한 사무실에 푹신한 의자에 영길이가 앉아있었다.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지 반가워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직원들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의 힘찬 목소리만 남자의 귀에 아직 남아있었다. 생경한 그의 태도에서 남자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왔을까, 후회되었다. 영길의 말은 간단했다. 다음 달에 아들 결혼식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도 없이 외로운 처지라 결혼식에 와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수향산의 갈피는 깊숙하다. 높고 낮은 봉우리가 갈피갈피 겹쳐 서있는 이 산줄기는 금강산의 맥이 남쪽으로 면면이 뻗어 점차 완만해지면서 이어진 곳이다. 산맥의 척추를 타넘는 바람줄기가 한 순간에 하얗게 서려 굳어서 봉우리마다 왕관처럼 덮이더니 흰 눈가루들이 계곡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등성이를 지나 산 아래 낮은 기슭에 다다르자 묘지들이 남자의 발에 밟힌다. 눈에 덮였다 해도 완만해진 묘의 능선은 오래된 봉분임을 말해준다. 평평해진 봉분을 보노라면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생의 활력이 식어버린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어때야 하는 것일까. 세월을 붙잡고 있기만 하면 천수를 다하는 것일까. 남자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열대지방 밀림의 골짜기아래에 코끼리뼈가 수북이 쌓인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어미가 죽었던 곳으로 가 쓰러지기 때문이라 했다. 그 곳은 삶 이전의 땅이었고 죽음과 삶을 가르지 않은 곳이라 했다. 어미의 땅이란 어느 곳을 말함일까. 삶을 붙잡지도 놓지도 못하는 질긴 집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자는 묘지들 사이의 미끄러운 길을 지나간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주저앉은 듯한 봉분들을 보니 일가도 없이 살았던 영길 아범의 쓸쓸했던 생전의 모습이 언뜻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남자는 크고 넓적한 바위에 발을 뻗고 앉는다. 쌓인 눈은 푹신한 햇솜 같다. 눈송이가 봉분들 위에 난분분하게 흩어진다. 황제도 남자의 발치에 앉는다. 황제의 머리 위에 하얗게 내린 눈을 보니 남자는 어렸을 적 집에서 키우던 백두가 떠오른다. 백두는 큰 점이 배와 등에 있고 정수리엔 흰털이 수북했다. 성견이 된 백두는 키가 어린 소년만 했다. 아버지는 농사가 한가해진 겨울이면 종종 아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다.

태백산맥 줄기에 휘감긴 이곳은 늘 겨울이 일찍 들이닥친다. 봄인가 싶으면 어느새 여름이었고 서늘해진다 싶으면 겨우살이 준비를 서둘러야하는 곳이다.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면 어느 결에 눈발이 떨어져 내린다. 깊은 산골짜기에는 겨우내 눈으로 뒤덮여 봄이 지나가도록 녹을 줄을 몰랐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설면 위에 움직임이라고는 아버지와 소년과 백두의 발자국뿐이었다. 고요히 눈 덮인 산에서 꿩이며 토끼며 노루를 잡았던 추억이 도시생활로 피폐해진 남자의 마음속에 아득하게 남아있다.

앞서서 걸어가는 아버지를 따라가며 백두와 뒹굴기도 하던 남자는 발도 시리고 배도 고팠다. 하늘은 차츰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갓난아이의 주먹만 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달빛 속으로 뛰어들면서 곧이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얼마큼 걸었을까. 소나무 숲을 벗어나자 머지않은 곳에 오두막집 불빛이 보였다. 숲 사이에 깊이 가려져 마치 웅크리고 앉은 것만 같았다. 남자는 아버지보다 앞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빛에 얼얼해진 남자의 눈에 오두막 안의 어둠은 풋밤껍질처럼 떨떠름하게 다가왔다. 밖의 기척을 느낀 영길아범의 음성이 문안에서 들려왔다.

"아이고 어르신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

"예, 오랜만입니다. 지나가다 불이나 좀 쬘까하고…."

아버지는 허리춤에 매달린 꿩들을 내려놓았다. 남자의 눈이 조금씩 밝아졌다. 네모진 벽만 있달 뿐 안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오른 켠에 아궁이 두 개가 놓여있고 왼편에 직각으로 붙은 온돌이 칸막이 없이 아궁이와 붙어 있었다. 온돌바닥이 남자의 허리께 쯤 높이에 얹혀 있었다. 영길아범이 이불을 걷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의 발치에 어린아이가 제 아버지를 따라 부시시 일어나 선잠이 깬 탓인지 칭얼거렸다.

아궁이에서 나오는 열기로 집안은 따스했다. 영길아범이 익숙한 솜씨로 지은 밥과 뜨거운 국을 먹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한 겨울 어둠이 내려와 앉았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궁이 속의 불빛뿐이었다. 두 아궁이 사이 좁다란 곳에 몸을 오그리고 자리 잡은 백두는 땅에 바짝 누워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아궁이 속에 타오르던 불꽃이 아버지와 영길 아범의 말소리에 맞춘 듯 잘게 너울거렸다.

"영길 엄마는 아직 차도가 없는 가."

아버지가 칭얼대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차도는 무슨…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영길 아범의 한숨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영길이를 낳은 후 산후회복이 더뎠던 영길 엄마는 차츰 중한 병으로 진행되어 친정으로 가 몇 년 지내더니 영영 돌아오지도 못하고 말았다. 영길 엄마의 이름은 봉님이었다. 어머니 쪽의 먼 친척뻘 되는 봉님이는 머리가 좀 모자란 듯 했으나 말수가 적고 늘 웃는 낯이었다. 남자가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것은 여름밤 대청마루에 드러누운 아들에게 부채질을 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물었다. 휴전선 넘어가기도 이제 글렀는데 사랑채의 이씨와 봉님이를 맺어주면 어떻겠느냐고. 가족도 없이 오갈 데 없는 그를 딱하게 생각했던 아버지가 마침 일손이 딸린 철이라 집에 묵게 했던 것이 하루 이틀이 되고 한철이 지났다. 그는 그냥 남자 부모의 먼 친척으로 차츰차츰 마을에 알려졌다.

그가 느지막이 아들을 얻고 그 애가 대 여섯 살쯤이 되자 사랑채에 있던 그의 가족은 산 아래 뽕밭 근처로 옮기게 되었다. 네 벽과 지붕을 만들고 나서 방과 부엌사이에 따로 칸막이를 치지도 않고 온돌과 부엌 아궁이의 높이를 똑같이 만들어 이어 붙인 그 집은 영길 아범이 손수 지은 이북식 가옥이었다. 겨울이면 추위가 그곳과 진배없는 강원도의 기후에 제법 걸맞는 방식이라고 했다.

눈꽃이 가득 피어오른 소나무 사이로 우유 빛 구름이 가득 들어차 있다. 산의 품은 넓다. 남자는 마음속에서 눈을 모두 걷어내어 예전의 경치를 회상한다. 산 아래엔 넓게 펼쳐진 평지가 보인다. 그 땅은 오래 전 남자의 아버지 소유였다.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고향 부근에 땅을 사들인 것은 울창한 숲과 거친 산세, 그리고 멀리 수평선에 가늘게 보이는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이란 이상한 곳이다. 마을 가까이에 들어서기만 해도 가슴이 더워진다.

소나무가 눈밭 위에 드리워놓은 엷은 그늘아래를 지나친다. 남자는 아버지의 그늘이 걷힌 순간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그늘 안에서 살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린 날의 온갖 기억들은 평온하고 아늑한 그늘 저편에 있다. 그 그늘이 지워지려는 이 순간 인생의 모든 것도 함께 지워져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평지 끄트머리에는 조붓한 시냇물이 흐른다. 남자가 어렸을 적 붕어며 가재를 잡기도 했다. 이 십 여 년이 지난 후 마침 관광지 개발이 한창이었을 때 남자가 이 일대의 땅을 헐값으로 넘겨 버린 것은 자동차 부품공장을 지을 부지를 사기 위해 은행대출을 받았다가 자금이 돌아가지 않고 은행이자를 당해낼 수가 없어 압박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산의 능선은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산중턱엔 스키장과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굵은 철탑들에 매달린 리프트 여러 대가 돌아가며 움직인다. 겨울철이어서 한시적으로 스키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을 벗어나면 뽕나무밭이 있었고 그 끄트머리쯤에 영길 아범의 집이 있었다. 남자는 어슴프레 한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랜 세월이 흘러갔고 생전에 땅을 팔아 물려준 돈은 자동차 부품공장에 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두꺼운 점퍼 위로 눈이 덮인다. 어디가 길인지 벌판인지 구분되지 않는 평지를 바라본다. 텃밭과 뽕밭 그리고 전답이 어디쯤이었을까. 사무실 건물 옥탑방에 처박혀 있는 아버지의 유품 중엔 고향의 냄새가 묻어있는 흔적이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눈에 불을 켜고 온갖 서류를 뒤지고 값나갈 만한 것을 가지려하던 채권자들도 내팽개쳐 버린 유품들 말이다. 돌아가면 한번 찾아봐야겠다. 낡은 사진이나마 틀어쥐고 기다리면 디뎌본 적도 없는 그 땅이 다시 남자의 것이 될 수나 있는 것일까.

총을 어깨에 둘러멘 채 골짜기에서 맴돌기만 하자 남자는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목이 마르다. 눈가루 한 움큼을 집어 입에 넣는다. 손은 추위에 오그라든다. 주머니 속에 시린 손을 넣어본다. 봉투 밑에 편지지가 만져진다. 영길이라는 사내의 편지가 오래 전 그의 아버지의 음성과 겹쳐져 남자의 귀에 와 닿는다.

영길 아범이 어린 남자를 바라볼 때의 푸근한 미소와 한 겨울이면 따뜻한 방구석에 앉아 자분자분 고향이야기를 들려주던 광경이 추위에 얼어붙은 남자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위가 어두워진 밤이면 고향을 떠나던 때의 일들이 영길아범의 뇌리에 떠오른다고 했다. 마을에 흉흉한 소식이 전해졌고 이제는 피해 떠나야한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선영이 잠든 산과 부모님이 내려주신 전답을 어찌하고 홀로 떠난단 말인가. 목숨이라도 건져야한다는 가족의 걱정에 떼밀려 그날 밤 남으로 무작정 내려왔다고 했다. 이북이라는 음험한 말과 영길아범의 봄 아지랑이 같은 미소를 조화시키지 못해 어린 남자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이북이었다고 해도 영길 아범의 고향마을엔 제법 아담한 집이 있었다질 않은가. 우물도 있고 감나무도 있었으리라. 사냥도 다녔다고 했다. 그러면 털이 부숭한 개도 있지 않았을까.

어린 날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이들의 얼굴이 남자의 눈에 어른거린다. 회사 다닐 땐 회사 일로, 사업을 시작한 후엔 또 거래처로 뛰어다니느라 아이들과 살가운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새 커버리고 말았다. 큰 아들 녀석이 고등학생이고 작은 딸 아이가 올해 중학교를 졸업한다. 아내는 늘 아이들 학교등록금이며 학원비며 뒷바라지가 힘들다고 투덜거리더니 어느 날 문득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곳을 떠나야겠어요."

"뭐라고."

"생각해봐요. 빚잔치에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생활비도 부족하고 학비며 학원비며 곧 대학도 준비해야 할 텐데."

 "…."

 아이들 학교에까지 채권자들이 수소문한다는 얘기를 아내는 하지 않았다. 아내는 사촌언니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미국에선 아이들 교육은 큰 비용 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유일한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일 것이다. 아내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이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법적 절차일 뿐이라는 아내의 말에 남자는 검은색 인감도장을 내주었다. 떠날 때 아빠의 얼굴에 갖다 대던 딸아이의 뺨은 아직도 꽃향기를 풍기는 듯하다.

 아내는 아이들과 비행기를 탄 후 일 년이 지나도록 아직 연락도 없다. 허리춤에 매달린 꿩이 흔들거린다. 어둠이 비칠비칠 다가오려고 한다. 언제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때가 오면 행복을 위해 헛된 발버둥을 치지도, 더 이상 남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어둠이 다가오기 전에 아주 큰 놈으로 한 마리 잡아야겠다. 마침 골짜기 뒤쪽에서부터 시커먼 물체가 나타나는 것 같다. 남자는 총을 장전한다. 이상스레 총만 들면 남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만 같다. 아버지의 불끈 솟은 팔뚝의 힘줄이 남자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총개머리에 어깨의 각도를 정확하게 맞춘다. 어깨에 중량감이 더해진다. 차가운 금속이 뺨에 닿는다. 아버지의 입김이 남자의 귓불을 스쳐지나간다. 힘이 넘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정확한 자세로 견착을 해야 되. 총을 쏠 때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것이 바로 견착이다. 격발에 정신이 팔려 견착을 무시하면 절대 안 된다. 견착이야 말로 격발의 시작인 것이야. 어떠한 견착을 하는가에 따라서 정확한 격발이 나온단다. 견착을 정확하게 했다면 적어도 80% 이상의 적중률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오랫동안 총을 쏘았어도 자신의 견착 지점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는 실패한 포수다.

 너처럼 쇄골에 총을 대어서는 절대 안돼. 어깨에 반듯이 대어야지. 시선을 정면으로 하고. 자신에게 맞는 견착을 찾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거야. 제대로 된 견착을 찾는 순간부터 비로소 사냥의 틀이 잡히는 거다.

 남자는 발에 힘을 준다. 아버지는 늘 아들에게 발을 땅에 굳건히 디디라고 했다. 설피를 신은 아버지의 커다란 발이 땅을 쿵쿵 내리쳤다. 총을 쏘는 데 급급해 발을 무시하면 큰 낭패를 보게 되지. 발이 안정되어야 정확한 사격이 가능해지는 것이야. 주문을 받고 제조를 하고 어음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다가 끝내 건물등기권리증을 넘겨줘야 했을 때는 맨 먼저 남자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버지의 논과 밭과 땅을 뿌리 삼아 올려지은 건물이 없어지자 남자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새가 날아오든, 짐승이 나타나든 허둥댈 필요는 없다. 얘야. 발에 힘을 주어라. 다리를 꼿꼿이 펴고. 아무리 거친 짐승이라도 불시에 나타나면 체중을 두 다리에 고르게 안배하고 상체를 안정감 있게 움직여야 해.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그렇지 않으면 되레 거친 짐승에게 먹히게 된단다. 남자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다. 짐승에게 먹히다만 자신의 육신이 찢어지고 눈 위에 버려진 채 남자의 눈앞에 잠깐 환각 속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뭇가지 사이에 쌓여있던 눈송이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 뭉치 남자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 발치에 앉아있던 황제가 맹렬하게 짖어댄다. 어깨에 총을 얹고 총구를 조준한다. 총구의 가늠자 속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난다. 노송의 그림자일까 먹이를 구하러 나온 멧돼지일까. 멧돼지라면…. 그 옛날 뜨거웠던 여름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남자는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소리와 함께 총열이 뜨거워진다.

 백두가 집을 나간 것은 그믐날 저녁이었다. 늦은 여름 밤 저수지 쪽에서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올 때 아버지는 총열과 개머리판을 분해하여 대청바닥에 펼쳐놓았다. 마른 수건에 기름을 칠해 표면을 유리알처럼 매끄럽게 닦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눈빛은 무엇엔 가에 홀린 듯했다. 이를 악문 얼굴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고 불그레한 목덜미는 땀이 솟아 미끈거렸다. 또 사냥을 가려는가보다. 졸음이 눈꺼풀 위에 막 쏟아지려는데 마당 한 켠 감나무 밑에 누워있던 백두가 눈치를 챘는지 꼬리 없이 밑둥만 남은 꼬리뼈를 살랑살랑 흔들며 올려다보았다. 포수들은 사냥개의 꼬리를 애당초 자라지 못하게 한다. 나뭇가지에 얽히면 신속히 몸을 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두가 아직 눈도 뜨지 못했을 때 뱃속부터 있던 꼬리를 아버지가 숫돌에 갈은 칼로 잘라버렸다.

 그날의 기억들은 마치 옷에 붙은 도깨비바늘처럼 지금도 남자의 살갗을 온통 찔러댄다. 햇살이 문풍지를 뿌옇게 비추어 밖에 나갔을 때는 해는 중천에 떠있고 아버지의 인기척과 백두의 짖음이 들리지 않고 개집의 주인 없는 쇠사슬만이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늦여름의 긴긴 해가 서산에 넘어가려 하고 느티나무를 스쳐 처마 밑 봉당까지 그 그늘을 길게 뻗친 후 어둠이 와락 마을을 삼켜버렸을 무렵이었다. 영길 아범의 숨이 턱에 닿아 까무라칠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박차고 나간 가족들은 피 묻은 그의 옷을 보았다. 입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서있는 영길 아범에게 어머니는 재빨리 한 바가지의 샘물을 떠주었다. 목이 탄 듯 들이키고 난 영길 아범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토끼를 쫓아 산 속 나무들 사이를 헤집고 아버지는 한 걸음씩 들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산그늘아래에 까지 불어올 즈음에야 시간이 흘러버린 것을 알았다. 어쩐지 산들이 미동도 않은 채 무엇인가에 대항하는 듯 했다. 산들이 어둠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소나무 잔가지들로 가려진 굴속에서 급작스레 짐승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영길 아범은 아버지가 엽총을 들어 겨냥한 후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쓰러진 사람은 더위를 피해 굴속에 들어가 있던 심마니들이었다. 그 캄캄한 밤중에 영길 아범이 어떻게 아버지를 데리고 내려왔는지 쓰러진 심마니들을 어떻게 떠메고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엽총을 뺏기지 않고 이제껏 남자에게 남아있는지도….

 구속되어 집에 없는 아버지의 자리에 흰 수건을 싸매고 누운 어머니의 신음소리만이 캄캄한 빈집을 채우고 있었다.

 "몹쓸 일이다. 새나 잡을 일이지, 누가 사람을…."

 긴긴 해가 열기를 쏟아 붓는 적막한 집에 남자 홀로 백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빈집에 달구어진 해만이 홀로 길게 그 빛살을 뻗쳤다가 거두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사흘이 지났다. 해거름에 길어진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마당을 지나 댓돌까지 비추었다. 남자는 집을 나섰다. 저수지의 개구리 떼들이 쉬지도 않고 울었다. 햇발 쨍쨍하여 오지게 뜨거운 한낮의 더위를 견디며 뽕나무 숲을 지나 영길이네 집에 거의 다다랐다. 빛살을 뻗쳤던 해는 열기를 조금씩 가라앉히려는 중이었다. 사립문을 긁는 소리가 안에서 드드득, 들려왔다. 남자는 쏜살같이 달려가 지치고 굶주려서 헐떡거리는 백두를 끌어안았다.

 산 아래에는 새하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가을 추수가 끝날 때쯤이면 소들은 코뚜레 박힌 콧구멍으로 뜨거운 콧김을 풀풀 거리고 발굽소리를 절그럭 절그럭 내며 들어왔다. 나무 바퀴가 휘어지도록 햇곡식을 실은 달구지는 긴 행렬을 지어 문 앞에 당도했다. 뜨거운 밥을 지어 소작인들을 대접하려고 일꾼과 바쁘게 몸을 놀리던 어머니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대청 위에는 아버지의 상이 마당 평상에는 영길 아범과 소작인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잘 익은 가을 해가 맑은 하늘에 동두렷이 떠있었다.  기슭아래 기름진 논을 심마니 가족들에게 보상해주어 버리고 나서 아버지는 자신을 소리 없이 따라다니며 뒷수습을 해온 영길 아범에게는 뽕나무밭 옆에 작은 집을 짓게 하고 사랑채에서 그곳으로 옮겨 논밭도 어느 정도 붙여먹게 해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는 남자에게 이곳을 뜨겠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몇 년 후 산 아래 옥토와 나지막한 임야를 팔아 사업한다고 손을 내미는 아들에게 뒷돈을 대주었을 초기에는 아버지는 별다른 걱정도 당부도 하지 않았다. 타지에서 자리 잡아가는 아들에게 일말의 기대 같은 것을 걸고 있지 않았을까. 마침 사업상 업종을 바꿔야했고 자동차부품에서 주차시설로 옮겨갈 때 투자해야할 액수가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집과 주위의 땅은 하나씩 없어져갔다.

 어머니는 굽어진 허리를 펴며 대청에 앉아 느릿하게 남자를 불렀다.  "형일아…."

 백두란 놈이 아무리 잡아끌어도 집에 돌아 오려하질 않으니 부엌 부뚜막 위에 끓여놓은 고깃국을 영길이네 식구에게 갖다 주고 남은 것은 백두에게 먹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고깃국을 받아들고 뽕나무밭으로 땀을 흘리며 한 참을 달려갔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어린 영길이가 달려와 반갑게 소리쳤다.

 "형. 백두가 새끼를 낳는다아…."

 남자는 뒤란으로 가서 가마니로 입구를 가려놓은 개집을 들추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물어버릴 듯한 소리가 이빨을 악물고 있는 백두의 턱에서 새어나왔다. 남자는 부드러운 말로 개를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목덜미 안쪽을 조심스럽게 살살 긁어 주었다. 눈동자가 풀어지고 기진 해 보이는 백두는 이를 물고 안간힘을 썼다. 등뼈를 웅크리고 비스듬히 누워있던 백두의 꼬리뼈쯤에서 새끼가 나오고 있었다. 여섯 마리의 새끼가 어미 몸에서 뭉클뭉클 차례로 빠져 나왔다. 뼈와 가죽만 남게 된 백두는 가까스로 움직여 먼저 나온 순서대로 새끼들을 하나하나 길다란 혀로 핥아 씻기고 주둥이로 물어다 차례차례 눕혀놓았다.

 남자는 고깃국을 조금 덜어 백두의 머리맡에 있던 밥그릇에 가만히 부어놓았다. 어미를 닮아 정수리 께에 흰 털이 수북한 강아지가 눈도 뜨지 못한 채 남자의 손에 미끄덩 만져졌다. 맨 처음 뱃속에서 나온 새끼였다. 그 새끼가 자라 성견이 되면 한 마리만 남기도 다 남을 주어버리기를 몇 해 걸러 반복했다. 강아지들은 계절이 두어 번 바뀌고 나면 곧 성견이 되었다. 멍석 위에 누워있던 강아지들이 어미젖이 모자라 헐떡이다가 손바닥 가득 소젖을 부어 내미는 영길아범에게로 몰려들었다. 혀로 숨 막히도록 핥고 있는 강아지들을 내려다보며 영길아범이 중얼거렸다.

 "쯧쯧 느그 껍데기도 고생이로구나."

 어미는 자식의 껍데기일까. 뱀이 허물을 벗어 던지고 나온 후에도 다시 그 허물이 그리운 것일까.

 남자는 또 한발의 총을 갈긴다. 발사의 반동으로 몸이 뒤로 젖혀진다. 멧돼지는 보이질 않고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쪽 깊은 산골짜기에서 깊고도 세찬 바람소리가 들린다. 거친 산맥의 잔 등을 훑어온 눈 실은 바람이 희뿌옇게 계곡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눈을 따라 어둠도 하얗게 내려온다. 희게 눈 덮인 산맥의 깊은 갈피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남자는 문득 영길이와 그의 사무실을 떠올린다. 영길이는 남자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을까. 영길이에게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아들 결혼식에 와달라고 했으니 또 다시 볼 기회가 있기는 하다. 오래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향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다른 곳은 다 놔두고라도 영길이네가 살았던 집과 전답이 자리하고 있던 그 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받았을까. 만나자고 한 것은 그 값을 되돌려주려고 그랬을까. 주소가 대치동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꽤 값나가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집도 오피스텔도 공장도 다 날린 자신에게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만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에도 흐릿하게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영길이로서야 지나쳐 버려도 될 일인데. 그 옛날 아버지가 그 자리에 집을 지어줄 때는 훗날 받을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뭇가지에서 미끄러진 눈이 얼굴에 떨어진다. 솔직히 그 땅 팔아 받은 돈을 차마 받지는 못해도 영길이가 여유가 있다면 좀 빌려 쓰고 싶기는 하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 어딘 가에서 얼굴도 못 본 사촌언니라는 이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텐데.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미도 없이 자란 영길이에게 손을 내밀게 되다니. 담대하되 정이 깊었던 아버지가 만일 아신다면 못난 놈이라고 나무라지 않을까. 남자는 머리를 흔든다. 그래도 한 가닥 미련을 버릴 수가 없으니. 그 돈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들여 단칸 월세 방이라도 얻었으면…가슴속을 온통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들이 영길이를 다시 만나면 좀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 옛날 아버지가 살려준 피난민의 어린아이. 따지고 보면 영길이와는 아주 남도 아닌데.

 눈은 이제 허벅지까지 쌓여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렵다. 남자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진다.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를 긋는다. 불꽃이 핀다. 일이 잘 되어 자금이 돌아간다면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채권자들의 지긋지긋한 독촉도 잠재울 수 있으리라.

 미친 듯이 짖어대는 황제의 쉬어터진 목소리만이 귀에 아슴프레 들려온다. 성냥불은 순식간에 꺼져버리고 남자는 생기 없는 눈동자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진회색 하늘이 더욱 굵어진 무수한 송이들을 내뱉어 창공은 거의 막힌 듯하다. 눈을 따라 어둠도 내려오는 것 같다.

 수향산 꼭대기에 쌓인 눈 더미가 마침 세차게 불어오는 북풍에 떼밀려 아래로 떨어진다.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눈인지 분간이 안 된다. 황제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게 되자 남자의 옷을 물어뜯는다. 옷이 찢겨진다. 어깨 죽지가 노출되자 칼날보다 더 매서운 추위가 온몸을 파고든다. 어디선가 푸드득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힘없이 눈을 떠본다. 커다란 맹금의 눈이 남자를 겨누어보고 있다. 노란 부리 끝이 눈앞에 다가온다. 허리께가 후들거린다. 이것이 피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허리춤 혁대에 매달린 꿩들은 축 늘어져 잔털을 흘리고 있다. 남자는 허리띠를 바짝 틀어쥐고 힘을 준다. 독수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와 남자를 노려보고 있다. 총으로 잡아야겠다. 샛노란 부리, 시커먼 털, 부리부리한 눈매의 매서운 놈이다. 방아쇠를 당겨야겠다. 총을 들려고 어깨를 움직여본다. 심하게 쑤신다. 몸은 이제 말을 듣지 않는다.

 독수리가 소리를 내지른다. 까아우우, 까아우우….

 "멀리나 가버려라. 이놈으 새야."

 북풍이 또 한 차례 거세게 불어온다. 바람이 울부짖고 눈의 무게에 짓눌린 나무들의 허리가 꺾어진다. 눈 내린 산 속의 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습적이다. 산꼭대기에서부터 바람에 밀려온 눈송이들이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린다. 남자와 황제와 독수리까지 다 쓸어버리려는 듯. 순식간에 발밑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보니 눈은 어둠에 깊이 잠겨있다. 남자는 힘없는 눈꺼풀을 들어 독수리를 올려다본다. 저 놈을 쏘아야겠다. 남자는 안간힘을 써서 헐벗은 어깨에 총을 얹는다. <끝>


"이제 시작…좋은 글 쓰고 싶어"
당선소감 - 노혜옥
<그림1중앙>
눈이 내린다. 한밤중에 내리는 눈송이들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떨어지며 가로등불빛에 비추어 몽환적으로 보인다. 길에 나무에 지붕에 눈이 내려앉아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간다. 공중에 휘날리는 눈송이들을 보며 내 마음도 어디론 가로 둥둥 떠내려가 아주 어릴 적의 공간으로 흘

러간다. 눈발에 같이 뒹구는 강아지의 움직

임,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버지의 허리춤에는 꿩들이 나란히 매달려있고, 때로는 산토끼도 매달려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쓸려 보내고 남아있는 것은 마음속의 한줄기 기억뿐이다. 기억속의 작은 점들은 상상 속에서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입체가 되어 현실과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까마득한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소설뿐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즐겁고 소설 속에서 슬픈 것, 때로는 그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삶의 어지러움이나 어려움도 저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뒤덮어가며 아름답게 빚어내는 것. 그것 또한 소설이 하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이제부터 시작이다. 너무 늦은 시작은 없다고 자신에게 말해 본다. 다만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 좋은 글, 좋은 작품을 많이 쓰고 싶다.

내 글을 주의 깊게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 1954년 강원도 강릉 출생
△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 200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마지막 처리 아쉽지만 문장밀도 높아"
심사평
- 문순태
<그림2중앙>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 10편중에서 7편의 응모자가 서울 등 수도권이고 광주ㆍ전남 지역은 3편에 불과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작가지망생들의 응모 비율이 70~80%를 차지했었는데, 최근에 뒤바뀌었다. 이제는 지방에서는 지방지 예선을 통과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경제난의 후유증을 다룬 내용이 압도적이었다. 문학은 사회를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를 형성하고 변화시켜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도시의 댐''홍채''챔피언이 살았던 집' '밈. A''소품영가' '미술관람 결''냄새''붉은 신호등''오이를 썰다가''견착'이다. 이들 작품을 놓고 문장에서부터 구성력ㆍ주제 등을 꼼꼼히 살핀 끝에 '홍채''견착''밈.A' 3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밈.A'는 광고효과와 거품 이야기다. 퇴직을 하고 평생교육 강사인 50대 남자는 그가 맡은 '광고의 이해'에서 해피 홈 피자가 로고송을 통해 효과가 바이러스처럼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재가 참신하고 재미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문장이 드라이하고 소설 미학적 형상화에 약점이 있다.

'홍채'는 불황으로 감원된 아파트 경비원의 이야기다. 문장력이 탄탄하고 아파트 부녀회장과 화자 간의 심리도 섬세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재가 진부한데다가, 금융피라미드사기에 걸려 집을 날린 동료경비원 S와 부녀회장과의 관계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다.

'견착'에서 주인공은 주차시설 공장을 운영하다가 불경기로 파산을 한다. 이혼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간 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아버지의 엽총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폭설 속에서 꿩 사냥을 하면서, 사냥을 좋아했던 아버지와 영길 아범 등, 기억 속의 과거를 통해 오늘의 나와 내 삶을 돌아보고 있다. 마지막 처리가 아쉽긴 해도 전체적으로 문장의 밀도가 높고 '견착'의 알레고리도 그런대로 살려냈다. '견착'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문순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