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옹관 제작기술, 남도 청자의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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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영산강 옹관 제작기술, 남도 청자의 밑거름
남도 자기의 독창성, 옹관에서 시작
성인 시신 넣을 대형 옹관
나주 오량동서 대규모 제작
강 통해 100여년동안 유통
  • 입력 : 2017. 08.04(금) 00:00
영암 옥야리고분에서 출토된 옹관. 목포대 박물관 제공
전남 도자의 독창성을 가장 먼저 완성하고, 뚜렷하게 인식시킨 문화유산은 거대한 옹관(독무덤)이다. 옹관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으나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대형의 옹관은 전남에서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 성행하였다. 고대 영산강 유역은 독특한 문화 요소인 대형 옹관을 무덤 축조에 사용하였다. 이는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옹관 고분사회라고 부른다.

옹관묘는 신석기시대 도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한반도 전역, 나아가 세계적으로 사용되던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전남에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된 다수의 대형 옹관묘가 확인되고 있다. 처음 일상 도기를 옹관으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점차 발전하여 3세기를 넘어서면 분구를 가진 옹관묘가 등장하고 성인 시신을 넣을 정도의 크기인 대형 옹관을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형 옹관은 크게 목이 있고 입술이 밖으로 벌어지는 유형과 목의 꺾임이 없이 몸통에서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가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옹관과 함께 출토되는 유물은 옹관 내부나 외부에서 확인된다. 이른 시기의 높이가 낮은 무덤에서는 이중구연호와 양이부호, 장경호, 광구호 등 부장품이 주류다. 크기가 높은 무덤에서는 개배와 고배, 병 등 새로운 기종의 도기가 등장하고 철기류 등의 금속 유물이 다량 부장되어 정치 경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도기는 백제적인 요소도 있으나 지역적인 특징을 반영한 독자적인 양식을 유지하면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6세기에 접어들면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옹관은 고분의 중심적인 매장 시설에서 벗어나 점차 쇠퇴 소멸한다.

영산강 유역 고대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대형 옹관은 일제강점기부터 나주 신촌리 고분을 시작으로 많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대형 옹관의 생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나주 오량동(사적 제456호)에서 대규모의 옹관 생산 요장이 확인되어 전문적인 생산 집단에 의해 대형 옹관이 제작돼 영산강을 통해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주 오량동 요장(가마터)은 나주시 오량동 산 27번지 일대로 가야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은 영산강 본류와 1㎞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옹관을 주변에 공급하는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까지 70여기의 가마와 폐기장 5기, 작업장 1기 등의 유구가 확인되어 옹관의 생산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마는 구릉 경사면의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축조됐는데,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반지하식으로 굴착한 다음 윗부분은 진흙과 풀 등을 섞어 만들었다. 구조는 부정확한 형태의 앞부분과 긴 타원형의 가마로 구성됐다. 땔감이 타는 연소부와 그릇을 놓는 번조실의 구분이 없는 통가마이다. 가마의 크기는 길이 590~815㎝, 너비 135~190㎝이며, 가마 바닥의 경사도는 10° 미만으로 낮게 만들었다. 출토 유물은 옹관 파편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옹관과 함께 번조한 완과 호, 시루 등의 도기를 비롯하여 도지미와 내박자 등의 다양한 제작 도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완은 바닥에 생산자를 나타내는 16종류의 각선부호가 확인되어 전문 집단에 의한 대량생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오량동 가마는 5세기대를 중심으로 100여년에 걸쳐 옹관을 전문적으로 생산 공급하여 독특한 도자문화를 꽃피웠다.

대형의 전용 옹관은 길이 150~200㎝, 지름이 80~100㎝, 두께 2∼3㎝, 무게가 300㎏~500㎏에 달하는 크고 무거운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러니 날그릇으로 만들 때부터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대형 옹관은 대부분 가래떡 모양의 질가래나 질판을 만들어 테를 쌓는 방법으로 제작된다. 이 과정에서 그릇이 무너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소성을 갖춘 점토를 준비하여야 한다. 또한, 일정 정도의 그릇형태를 유지해주는 가소성을 갖추고 있어도 밑부분과 윗부분의 수분이 고루 말라야 무너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건조된 날그릇 상태의 옹관을 가마로 옮기고 적재하는 것도 수준 높은 기술을 요구한다. 도자는 높은 고온에서 완성되고 이를 식히는 과정 등에서 팽창과 수축이 진행된다. 옹관이 터지거나 금이 가 실패품이 발생하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화력 관리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전문적이고 집단화된 기술의 보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문 집단을 통제 관리할 수 있는 운영 능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 충분 조건을 갖추고 발전 변화하였던 옹관 제작기술은 이후 영암 구림리 등의 도기 제작 집단에게 전수되어 남도 청자 발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마한 등 고대 국가 중 자기를 가장 선호하였던 나라는 백제이다.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듯 백제에서도 거점 지역이었던 서울과 충청남도, 전라북도에서 자기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자기는 모두 중국에서 수입돼 왕실 등 중앙에서 선물로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용보다는 신분 과시와 권위를 상징하는 등 위세품 역할을 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현재까지 여수 고락산성(전라남도 기념물 제244호)에서 중국 남조(南朝)에서 생산된 청자잔 1점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전라남도 지역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고, 옹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전라남도 사람들이 중국 자기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전남지역은 완도 청해진 장도 유적과 광양 마노산성을 중심으로 주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신라 하대 많은 지역에서 중국의 청자와 백자를 수입해 사용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이 시기는 차문화가 성행하여 경주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 남원 실상사 보령 성주사, 영월 흥녕사 등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 중국 자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나 보림사와 태안사, 쌍봉사 등 전라남도의주요 사찰에서는 이 시기 중국 자기가 현재까지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백제시대처럼 중국 자기의 선호도가 낮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달리말하면 지역만의 자기를 만들기 위해 일찍부터 청자를 생산하고 발전시켰던 배경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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