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축조… 한ㆍ일 고대사의 핫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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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6세기 축조… 한ㆍ일 고대사의 핫 이슈
일본 지배 주장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전방후원분
유일하게 영산강 유역서 발견… 50년동안만 '반짝'
"일본 거주했던 마한인 무덤… 어떤 형태든 교류증거"
  • 입력 : 2016. 11.24(목) 00:00
한ㆍ일 고대사의 미스테리인 영암 시종면 태간리 장고분. 1호분은 길이 45m, 높이 6m로 규모가 큰 편이며,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관측된다. 김양배 기자
영암 마한 현장을 가다 <하> 태간리 장고분


장고분은 영산강 유역 마한 고대문화권의 가장 민감한 유적ㆍ유물이다. 한ㆍ일 고대사의 첨예한 논쟁거리인 임나일본부설과 맞닿아 있다. 임나 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으로, 조선말 일제 강점의 이론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 임나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일본측에서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을 들고 있다. 물론 한국 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전방후원분이 전세계에서 일본에서만 보이는 '일본형 묘제'라는데 학계의 속앓이가 있다.

지난 1991년 함평 신덕고분 발굴 당시 에피소드가 민감성을 반증한다. 국립광주박물관이 신덕고분을 발굴 조사한 뒤 전방후원분으로 발표했다. 국립기관이 직접 조사해 한반도 남단에 전형적인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한 셈이다. 이는 어찌보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발굴성과로 보여졌다. 당시 발굴에 나섰던 국립광주박물관은 전방후원분 인정 후 상당히 곤욕을 치른 것으로 고고학계에 전해져 온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항의성 전화를 했으며, 정식발굴 보고서 대신 간략한 행정보고서만 발간하고, 이마저 '대외비'로 처리했다고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광주박물관의 발굴 성과가 자칫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했을 것"이라고 전한다.

일본 고대사는 죠몬 시대, 야요이 시대를 거쳐 4세기 무렵 이후 고분 시대로 접어든다. 이 고분 시대의 마스코트가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형태의 소위 전방후원분이라 불리는 무덤이다.

발굴자에 따라 장고분, 장고형 고분, 전방후원분,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굴이 보고됐다. 대략 13기 내외로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영광군 월산리 월계 고분 △담양군 고성리 월성산 고분 △담양 성월리 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해남 용두리 고분 등 이다.

이들 장고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50년 동안 반짝 나타난 무덤 양식이었다. 고분들은 전남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규모는 대부분 40~50m 내외로 그리 크지는 않은 편이다. 해남 방산리 고분만이 전체 길이가 77m로 지금까지 발견된 장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전라남도기념물 제 190호로 지정된 영암 시종면의 태간리 자라봉 고분. 태간리 고분을 자라봉 고분이라 부르는 것은 공중에서 본 평면 형태가 마치 목을 내민 자라를 닮았기 때문이다. 1991년과 2011년, 2015년 등 세 차례에 걸친 발굴을 통해 원형 봉분이 축조된 다음, 이에 덧붙여 앞쪽의 방형 봉분을 완성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동안 광주 명화동 장고분과 함평 신덕 장고분의 경우, 원형과 방형 봉분이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라봉 고분의 봉분 축조 방법은 일본 오사카의 쿠라츠카 고분 등에서도 발견되어 한 ㆍ일 고대 관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발굴 결과 원형의 봉분과 방형의 기단 사이인 도랑에서 원통형 토기 등 50여 점이 출토되었다. 돌방 출토 유물 등과 원통형 토기 등은 봉분의 축조 시기가 6세기 초임을 보여준다.

한ㆍ일 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인 장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주인공이 마한인이든 왜인이든 임나일본부설과는 관련이 멀어 보인다. 마한인일 경우 임나일본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고, 왜인이라고 해도 장고분의 분포가 광주, 영암, 영광, 담양, 함평, 해남 등 여러 곳에 드문드문 산재한 것으로 보아 일본이 영산강 유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임영진 전남대교수는 장고분의 피장자와 관련, 주목할 만한 학설을 제기한 바 있다. 임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은 마한인으로 일본에 거주했다가 일본 내 전쟁 등 외부상황에 의해 다시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한ㆍ일고대 시기 재일동포 또는 그 후손의 무덤이라는 설명이다. 아직도 장고분의 축조 원인과 피장자의 주체에 대해서는 통설이 없는 상태다. 그만큼 연구과제가 무궁하다는 뜻이며, 한ㆍ일고대사를 두고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장고분과 원통형 토기의 출현은 영산강 유역이 어떤 형태로든 규슈 지역과 빈번히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태간리 자라봉 고분은 주인이 누구인지, 임나일본부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 1500년 전 한ㆍ일 고대사의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다.

이건상 선임기자 gslee@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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