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년 동안 그대로 보존된 '이순신 샘'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노기욱의 남도이순신
419년 동안 그대로 보존된 '이순신 샘'
서해로 진출하는 요로서 조선 수군의 식수 공급해
  • 입력 : 2016. 11.11(금) 00:00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머문 '전라우수영성'에 남은 군정인 '이순신 샘'.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와 선두리 일원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5호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으로 승격 지정됐다.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장군의 가장 중요한 해상통제영이었던 곳이다. 조선 수군의 본거지이던 전라우수영의 역사와 공간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사적이 됐다. 이순신장군이 명량 대첩을 이룩한 지 419년 만이다. 오늘날 말하는 사적이란 어떤 의미는 주는 가하는 점이다. 문화재 가운데 역사상 또는 학술상 가치가 큰 유적지를 국가가 법으로 특별히 지정하고 주변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한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1377년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으로 처음 설치됐다. 그 후, 1440년 현 우수영(해남 황원곶)으로 옮겼다. 1465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했다.

이후 1479년 현 여수(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이 되었다. 한때는 14관청과 19진을 거느린 대규모 군사거점이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2,843척, 높이 11척이었다. 가옥은 620호가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성안에는 시장이 열릴 정도로 큰 규모였다. 군사관련 건물인 무기고와 장교청이 있었다. 수군 장졸 1,085명이 주둔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남해해상에서 서해로 진출하는 요로를 지키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선조임금이 선전관 박천봉에게 보낸 유지를 받게 된다. 이 명령서에는 '미약한 조선수군을 없애고 권율 부대에 합류해서 싸우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즉시 선조에게 "임진년부터 5~6년에 이르는 동안 적이 감히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조선수군이 그 바닷길을 막아낸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지금 만일 조선수군을 모두 폐지한다면 이는 적이 다행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결국 적들은 호남 해안으로부터 한강까지 일시에 진격할 것입니다. 그런즉, 이는 신하인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약한 신하가 죽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여 전투한다면, 감히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그는 우수영으로 달려가 바닷길을 가로 막고 '명량대첩'을 위한 전략에 착수했다.

오늘날 남겨진 전라우수영성은 이순신과 그의 군사들이 1~2m정도 크기의 기단돌 위에 단단하게 수축한 성이다.

성곽은 둥근형태로 동서남북 4대문과 외곽에 북장대를 두었다. 남문 밖에는 선소가 있었다. 이 곳에는 현대식으로 복원하여 만든 거북선과 판옥선이 정박하고 있다.

전라우수영성에는 당시 사용하던 군정 2개가 남아 있다. 하나는 네모난 사각형 군정이며 하나는 육각형 방죽샘이다. 이 방죽샘은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을 치루기 직전 이순신과 휘하의 군사들이 밥을 짓기 위해 식수를 공급받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은 더 많은 수원을 보존하기 위해 이곳에 6개의 큰 판석을 짜 맞추어 육각형 석정으로 수축했다. 이 후 군사들은 이곳을 '이장군샘'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물이 마르지 않고 원형으로 보존돼 있다.

노기욱의 남도이순신
노기욱의 남도이순신 최신기사 TOP 5